치앙마이에 와버렸어

by SHUN

치앙마이 신고식


치앙마이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알아차린 사실은 캐리어 바퀴가 하나 빠져있단 것이었다. 이 캐리어로 말할 것 같으면 구매한 지 이주일도 되지 않은, 실사용한지는 이틀 된, 엄마가 큰 맘먹고 홈쇼핑에서 세트로 주문했던, 내 몸뚱이보다 아끼며 붙어있는 스티커도 떼지 않은 채 두 손으로 애지중지 끌고 온 그런 녀석 되시겠다. 그런데 바퀴가 하나 없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너무 오래 끌어서 바퀴가 닳아 나가떨어진 거면 몰라. 약 2년 전 누나가 사준 캐리어는 그랬다. 두 달간 유럽의 비포장 도로를 누비다 보니 바퀴 하나가 닳아 나가떨어졌었다. 그 때문에 캐리어를 쇼핑백 마냥 두 손으로 들고 다녔었다. 그 이후론 여행 갈 때 절대 캐리어를 안 가져갔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사는 거니까. 큰 짐의 이동이 거의 없으니 캐리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이틀을 못 가니? 네가 유럽 비포장 도로를 달렸니 뭘 했니? 이번엔 속상한 정도가 아니라 분노가 차 오른다. 캐리어를 만든 내셔널 지오그래픽 측에 문의하니 컨베이어 벨트에 바퀴가 끼어 빠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한다. 한번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보시겠어요? 나, 이런 변명 같은 대응 너무 싫은데. 휴, 그래서 뭐 어쩌겠나. 내 몸은 이미 치앙마이에 있고 이빨 하나 빠진 이 녀석은 내 옆에 있는걸. 유모차에 탄 아기를 확인하듯 1분마다 멈춰 캐리어를 살피며 숙소로 향했다.

IMG_8233.jpg 빠진 캐리어 바퀴. 부들부들.



오늘 밤 귀요미는 나야나


치앙마이의 첫 날을 책임진 숙소 호스텔 바이 베드 HOSTEL BY BED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다. 워낙 평이 좋은 곳이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만큼 좋았다. 호스텔이라는 단체 생활의 특성만 배제한다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더군다나 나를 담당한 리셉션 직원 두 명이 자꾸만 나보고 귀요미란다. 태국에서 통하는 글로벌 귀요미 되시겠다. 줄여서 글로미.

리셉션에 뭘 물어보러 갈 때마다 직원은 귀요미, 옵빠 사랑해요 같은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물어본 질문에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부디 '귀요미'가 한국인 손님을 위한 리셉션 가이드 매뉴얼이 아니길... 비는 나는 이미 귀요미랑은 거리가 먼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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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곳을 찾아보자


체크인을 마치고 바로 나와 자전거를 빌려서 미리 알아둔 방을 보러 갔다.(자전거 하루 80바트)

리셉션의 아저씨(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아저씨라 칭하겠다.)는 점심식사가 거하셨는지 곤히 자고 있었는데 나의 등장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났다. 자는 거 다 봤거든요.

한 달간 묵을 방을 찾는다고 하니 아저씨는 이내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파일을 뒤졌다. 딱 하나 남았단다. 봐도 되겠느냐 물었다. 따라오란다.

안내받은 방은 5층이었다. 사실 제일 궁금한 건 가격이지만 왠지 아마추어 티를 내고 싶지 않아 괜히 수압을 체크하는 척 싱크대며 화장실이며 돌아다니며 물을 틀고 다녔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약 48도 정도 틀어 아저씨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예요?"

"포티다우전 바트"

40,000바트.

"오케이, 땡큐"

서둘러 방을 빠져 나왔다.


아직 태국에서 이틀째라 40,000바트가 얼만진 가늠이 되진 않았지만 내가 예상했던 13,500-14,000바트를 훨씬 뛰어넘는 가격이라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계산해보니 140만원가량 된다. 미쳤어.

그런데 나오자마자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한국에서 이 숙소를 알아봤을 땐 제일 비싼 방이 2만바트 조금 넘었었는데 웬 4만 바트?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은 하나.

'포틴을 포티로 잘못 들었구나.'

그 방 값은 14,000바트였던 것이다.


다시 돌아갔을 땐 아저씨가 없었다. 리셉션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저 멀리 화단에 물 주던 할아버지가 와서 '이 아저씬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요단강이라도 건너신 건가. 그럼 이제 나는 어떡하느냐고 물으니 바로 옆의 계열사의 레지던스로 가서 문의해야 한다 알려 주셨다.

그래서 레지던스에 가서 아까 그 방을 문의했다. 레지던스 직원들은 뭔가를 한참 하더니 2층에 방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응? 아까 그 아저씬 5층에 그 방 하나 뿐이랬는데. 게다가 13,500바트. 아까 본 방보다 500바트가 더 쌌다.

13,500바트짜리 방은 (내겐) 더 좋았다. 2층이라 걸어 올라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창 밖으로 초록색 정원이 보였다.

발품 팔아봐야 다시 여기로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약해버렸다. 이틀간 발품 팔아 집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없었다. 당장 내일 들어오는 것으로 계약해버리고 쿨하게 밥 먹으러 갔다.

IMG_8408.jpg 속전속결, 내가 계약한 방



행복은 가장 가까이에 있어


저녁을 먹어야 했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밥다운 밥을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손목의 스마트 밴드는 2만보 가깝게 걸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소모한 칼로리는 4,000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자전거를 두고 올드타운을 걷기 시작했다. 주위에 많은 로컬 식당이 보여 그곳에서 먹을까도 싶었지만, 뭔가 더 깨끗한 곳에서 먹고 싶었다. 그래서 가격이 조금 있지만 적당해 보이는 장소에 앉아 팟타이를 주문했다. 근데 아까부터 계속 오른쪽의 누군가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눈빛이다. 아니, 잠깐. 오른쪽은 벽인데. 고개를 돌리니 작고 귀여운 바퀴벌레 한 마리가 인사한다. '안뇽?'

그 와중에 팟타이가 나온다. 팟타이에 눈길을 준 사이 바퀴벌레는 사라졌다. 으으..... 으으으!!!!!! 어디 간 걸까!!! 일단 먹긴 해야 하니 팟타이를 먹는 데 맛이 없다. 너무너무 맛이 없다. 더군다나 입 안에서 터지는 새우의 식감은 짖꿎은 나의 상상력을 자꾸만 발동시킨다. 새우는 사실 바퀴벌레의 조상님이었다는 괴담이 떠오른다. 오늘의 첫 식사는 망했다.

IMG_8253.jpg 태국에도 맛 없는 팟타이는 존재한다.


너털거리는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숙소에서 딱 세 걸음 거리에 엄청나게 괜찮은 식당이 하나 보인다. 음식값은 더 저렴하다. 왜 나는 제 발로 거기까지 걸어가서 내 돈을 쓰며 바퀴벌레와 인사하고 온 걸까.

교훈을 하나 얻는다. 행복은, 늘 가까이에 있어요. 바퀴벌레도 가까이에 있구요.




여행지 정보

호스텔 바이 베드 HOSTEL BY BED

IMG_8258.jpg 오른쪽에 보이는 냉장고가 생수 냉장고다. 아무때나 가져다 마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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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8240.jpg 2층에는 공용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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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킹닷컴(Booking.com)의 평점이 거의 만 점에 가까운 숙소였다. 전체적으로 모든 점에 만족스러운 호스텔이다.

무료 생수 냉장고가 있어서 언제든 가져다 마실 수 있다. 생수를 진열해 놓은 냉장고는 이 숙소의 시그니쳐 처럼 느껴진다.자동 커피 머신도 있어서 언제든 마실 수 있다. 다만 뜨거운 커피만 가능하다. 공용 테이블 위에 놓여진 바나나도 배고플 때 뜯어 먹으란다. 적어도 여기서 굶어 죽을 일은 없어 보인다.

개인 침상은 호텔처럼 카드를 꽂으면 전기가 들어오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어있다. 침상에 들어가 커튼을 치면 거의 완벽한 개인 공간이 된다. 안에서 책을 읽을 수도,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할 수도 있다. 단, 뭔가를 먹을 수는 없다. 더러워지니까.

가격은 도미토리룸 기준 405바트(2017년 10월 기준)로 저렴하다. 내가 갔을 땐 20% 할인 행사중이었는지 숙박을 늘리겠다고 하니 할인된 가격으로 해줬다. 그러나 바로 한달 살 집을 구해버리는 바람에 다시 취소했다. 리셉션 직원은 매우 아쉬워했다. "귀요미 왜 구래욥"이라고 했으니까....

조식이 제공된다. 매우 괜찮다. 헤이 방콕의 안타까운 조식과 비교되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신선한 과일과 샐러드 빵 등이 제공된다. 먹은 뒤에는 본인이 설거지 해야한다.

짐을 맡길 수 있다. 오토바이 면허 발급에 필요한 서류 때문에 한인회에 가야 했는데 마침 이 숙소와 멀지 않아 아침 일찍 체크아웃하며 짐을 맡기고 자전거 타고 다녀왔다.

수건은 리셉션에 요청하면 받을 수 있다. 다만 보증금 200바트를 내야하는데, 깨끗하게 사용하면 체크아웃 시에 돌려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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