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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ug 10. 2020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시작 하기도 전에 망한 여행

 불길한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


 출국 일주일 전부터 크고 작은 악재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그 시작은 암스테르담에서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잘못 예약한 것이다.

 여행에 앞서 두 달간의 교통편을 전부 예약하기로 마음먹었다. ‘유레일’같이 일정 변경이 가능한 티켓을 구입해도 됐지만 모든 교통편을 따로 예약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10만원이 넘는 스트라스부르행 열차 티켓은 시간이 지나면 더 비싸질 것 같아 서둘러 결제했다. 거기까지는 노 플라브럼.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티켓 수령 방법을 ‘우편’으로 선택하고 주소지에 세상에 존재 하지도 않는 이상한 주소를 적어버렸다. 당연히 온라인으로도 발권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결제를 마친 뒤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상세 페이지를 클릭했다. 아니나 다를까. 깨알 같은 글씨로 ‘온라인 티켓은 따로 발권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곧바로 해당 사이트에 문의했지만 우편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무조건 우편으로 전달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심지어 실물 티켓이 있어야만 탑승이 가능하다는데, 그 실물 티켓은 이미 발송이 되었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적어놨던, 우주에도 존재하지 않는 주소로 말이다.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10만원을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 10만원이면 돈가스를 대체 몇 장이나 팔아야 하는 거야, 같은 생각과 함께 미친 듯이 속이 쓰려왔다.


 며칠 뒤엔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한창 술자리를 갖던 어느 날, 귀가하는 택시 안에 지갑을 놓고 내렸다. 현금은 얼마 없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여행에 필요한 신분증과 카드들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발급 받아놨는데 통째로 잃어버렸다. 그것도 출국 일주일 전에.

 부지런함도 덜렁대는 멍청함 앞에선 아무 쓸모없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일을 그만 두고도 쉬지 못하고 출국 하루 전까지 새로운 카드들을 열심히 발급받고 다녔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액땜이야. 큰일을 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던 나를 다시 만난다면 엉덩이를 마구 때려줄 것이다.

 지랄 마. 이건 경고야. 기차표를 잘못 예매하고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진작 눈치 챘어야 했다. 이건 경고임을.

 경고였다. 더 끔찍한 악재를 앞둔 멍청한 나를 두고 항상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는 경고 말이다. 경고를 인지하지 못한 나 같이 멍청한 사람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고야 만다. 완벽하게 계획해놓은 여행을 아예 떠나지도 못하는 상황과 같은. 그래서 뭐, 출발하는 비행기라도 놓쳤다는 거야? 네, 정확하십니다. 그런 불길한 예감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네요. 여행 당일, 나는 출발하는 비행기를 놓쳤다.



  새벽 4시 반, 가족들이 잠든 사이 조용히 집 밖을 빠져 나오기 위해 짐을 챙겨 도둑발로 거실로 나왔다. 조용히 나가려고 했지만 내 인기척에 눈을 뜬 엄마가 잘 다녀오라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아빠는 난생 처음 떠나는 나의 장거리 여행이 걱정 됐는지, 출근을 뒤로한 채 나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무거운 캐리어와 함께 공항 철도에 몸을 싣고 세 시간쯤 달렸을까. 겨우 눈을 뜨니 어느덧 인천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전날 밤, 한 시간도 못 잤다. 이렇게 멀리 떠나는 건 난생 처음이라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덕분에 인천 공항은 그 규모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다가왔다. 마치 광활한 우주 같았다. 긴장과 피곤이 혼란하게 섞여 별 거 아닌 현실을 훨씬 부풀려 버렸다. 우주 같은 광활함의 한 가운데 서 있자니 스스로가 코 푼 휴지조각이 된 것만 같았다.


 서둘러 체크인을 마쳤음에도 출발 까진 2시간 가까이 남아있었다. 뜻밖의 여유가 생긴 아빠와 나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가볍게 공항 구경을 했다.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던 아빠는 딱딱한 시멘트 바닥 위로 내 카메라를 떨구기도 했다. 카메라는 무사했지만 플래시 쪽이 찌그러져 망가졌다. 잠깐 속이 쓰렸지만 이 또한 액땜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런던에 도착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란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출근해야 하는 아빠는 돌아갔다. 넓은 공항엔 정말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출국 심사를 마친 뒤 터미널 안의 끝없이 펼쳐진 면세점 구경에 혼을 뺐다. 어느덧 출발 시간이 가까워졌고 슬슬 서둘러야겠다 싶었다. 그 와중에 유럽에 거주하는 지인에게 선물할 담배 두 보루를 구입했다. 바쁜 와중에도 지인을 챙기려는 스스로의 섬세한 센스를 칭찬하며 게이트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걸어도 내 티켓에 적힌 게이트 번호가 나오지 않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내가 탑승하는 터미널은 2터미널이었고 내가 있는 곳은 1터미널이었다. 터미널이 당연히 하나인 줄 알았는데, 1터미널에서 2터미널로 넘어가야 했던 것이다.

 10분 남았는데. 괜찮을까? 그래, 까지 것 뛰어가면 금방이겠지.

 그런데 2터미널은 열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단다. 아니, 왜 같은 터미널끼리 무슨 열차씩이나 타고 이동해야 한담. 아냐, 괜찮아. 여행 전부터 액땜 충분히 많이 겪었잖아. 얼른 가서 탑승하면 되지. 약간의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는 무시할 수 없었다.

 ‘망한 것 같은데.’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땀 한 줄기가 주륵 삐져나왔다. 2터미널로 가는 열차는 왜 이리 안 오는지, 불안함에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근처에 있던 직원을 붙잡고 티켓을 보여주며 물었다.

 “저 이 비행기 탈 수 있을까요?”

 티켓을 잠시 살펴본 직원은 바로 오는 열차를 타고 서두르면 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의 긍정적인 대답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열차가 도착했고 재빨리 몸을 실었다. 나머지 승객들이 전부 탑승하고 문이 닫혔다. 그 1분 남짓한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느껴졌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드디어 열차가 출발했다. 후, 잠깐 숨을 돌리자. 한 정 거장뿐이니 금방 도착해서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야. 그럼에도 내 심장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녀석처럼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 순간,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낯선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든 휴대폰 액정 위로 떠오르는 처음 보는 번호. 차라리 보이스 피싱 이어라, 차라리 대출 상담 전화여라, 차라리 잘못 걸려온 전화여라. 그냥 받기엔 너무 불길하고 또 불길한,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지 않은 전화 한통이 나의 왼손에 쥐어졌다. 하필 이 순간 떠오르고 마는 기분 나쁜 한 문장.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불길함이 칼날처럼 피부 위를 스쳐 지나갔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흥건해진 오른손을 바지 위에 쓱쓱 닦아내곤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세상에서 가장 느렸으면 하는 속도로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윤수훈씨! 지금 어디 계세요?!”

 나를 찾는 낯선, 그러나 너무나도 다급한 목소리. 제발, 제에발, 최악의 예감만은 비껴가길 바라며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저... 저 지금 2터미널 거의 다 왔어요...!”

  그러나 수화기 건너에선 건조한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오늘 비행기 못 타십니다.”

  그럼 그렇지. 불길한 예감은 절대 틀리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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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ct : shun-y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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