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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ug 03. 2020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 일이 운명이라면

 돈가스 절도(?) 사건으로부터 몇 주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과 같은 일상이 돌아왔다. 새벽같이 출근해 돈가스 명상, 이어지는 열정적인 판매와 마감 정리, 피곤에 찌든 퇴근 까지. 감정이 요동칠 땐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는데, 인생이란 생각보다 훨씬 촘촘한 짜임새로 짜여 있나보다.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걸 보면.


 사건 이전의 일상이 1막이었다면, 2막, 그러니까 사건 이후의 일상은 무언가가 확실히 달라져있었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죽어있는 사람처럼 느끼지 않았다. 밥을 굶기 일쑤였던, 빨간불 앞의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이는 상상을 했던 이전의 나와는 완전히 작별을 했다.

 이 일을 오로지 돈을 벌어다 주는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싶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시작한 일은 맞지만 어찌됐든 이 일은 나의 일부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순간이 있다.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 놓여야만 하는, 일과 나 사이의 괴리감이 못 견디게 괴로운 순간들.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며 돌아본다한들 결국 귀결되는 종착지는 나의 선택이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이는 일은 없었을 테니. 그러니  할 수 있는 거라곤 허벅지를 꼬집으며 자책하는 일 뿐 일지 모른다.

 물론 언제나 유효한 선택지가 있다.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두고 포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유럽에 가야 하니까. 그게 내 목표니까.

 유럽에 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해야만 한다. 꾸역꾸역 삼키는 기분이 들어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만약 지금이 운명을 믿는 그리스 로마 시대였다면 나는 진작 사랑하는 쪽을 택했을 테다. 어차피 이렇게 살게 된 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내려 했을 테니까. 보통 그런 일을 두고 사랑이라 하지 않는가. 거지같음 속에서도 옅게 빛나는 작은 조각이나마 찾으려 하는 움직임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하자. 그러나 눈앞엔 여전 돈가스용 돼지고기가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오늘 만들어 팔아야만 하는 할당량이다. 다시 생각했다. '차라리' 사랑하자. 차라리면 어때. 포기 아닌 선택지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출근 마지막 날이 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옷을 갈아입고, 돈가스와 떡갈비를 만들고, 물건을 팔았다. 마지막이라 하면 조금 특별해도 되지 않나 싶었으나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고, 팀장님이 다가왔다.

 “얼른 가봐.”

 “네? 벌써요..?”

 “마지막 날이잖아. 오래 있어서 뭐하니.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어.”

 마지막 날의 특별함은 팀장님이 장식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감사했습니다.”

 예정보다 훨씬 이른 퇴근, 한창 바쁠 시간에 빠져나오는 게 미안했지만 기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서둘러 탈의실로 올라갔다. 출, 퇴근 때마다 항상 복장을 체크했던 반신 거울 앞, 그 속의 내 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꼬깃꼬깃한 블루 스트라이프 와이셔츠와 얼룩덜룩한 앞치마, 빳빳하게 풀이 잘 먹은 조리모까지... 이곳에 처음 왔던 때가 떠올랐다. 이젠 그때의 나 같은 친구가 이 옷을 입게 되겠지.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떠올라 가방 안에 유니폼을 챙겼다. 내 일을 이어서 할 친구는 출근 첫날부터 앞치마에 물티슈질을 안 했으면 싶어서.


 옷을 갈아입고 매장 밖으로 나오니 간만의 붉은 하늘과 마주했다. 해가 다 뜨기도 전에 출근해 완전히 어두워져야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던 지난 6개월. 목표했던 돈도 다 모았고, 비행기 티켓도, 여행 준비도 다 끝나 있었다.

 그 순간 주머니 깊숙이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디니?”

 “일찍 끝나서 지금 집에 가려고.”

 “오늘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과일 바구니 사놨는데.”

 “과일 바구니?”

 “응. 너 일하는 층 코인라커에 넣어두고 왔어. 전해드리고 인사하고 와!”


 서둘러 코인라커를 확인하러 내려갔다. 라커 안에는 커다란 과일바구니가 들어 있었다.

 과일바구니를 챙겨 다시 매장을 찾았다. 매장은 프리다 칼로 팀장님과 페페 형님의 장사로 정신이 없었다. 잠깐 동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사복을 입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매장 풍경은 생각보다 더 낯설었다. 십 분 전만 해도 저 안의 직원이었는데, 참 순식간이구나 싶었다.

 이윽고 매장은 한산해졌고 그제야 매장 가까이로 갈 수 있었다.

 “어, 아직 안 갔어?”

 “이거 저희 어머니가 챙겨주셔서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과일바구니를 받은 팀장님은 뭐 이런 걸 준비했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나를 꼭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잠깐 당황했지만 마음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오는 것 같았다.

 "여행 가서도 항상 건강하고, 다시 한국 오면 꼭 연락해."

 유난히도 강렬했던 팀장님의 까맣고 커다란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팀장님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꼭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 자리에 조금만 더 있다간 나 또한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머쓱하게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 매장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아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간판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울렁이며 춤을 추는 빛줄기들과 함께했다. 마지막 퇴근길이었다. 2013년의 어느 날, 그렇게 6개월간의 일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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