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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ug 17. 2020

설마 했던 일

설렘의 멱살을 부여 잡고서라도

 달렸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그냥 달렸다.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냥 달리는 일뿐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부처님, 시바신님, 알라신님,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불러 모아 기도 하며 미친 듯이 달리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정신없이 달려서 그토록 찾고 있던 출발 게이트에 도착했다. 누가 봐도 수속이 끝난 텅 빈 모양새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리창 밖으로 얼굴을 돌리니 이륙 중인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구나, 내가 탔어야 하는 비행기.

 눈앞에서 떠나가는 비행기를 보고 나서야 모든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나마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길 바랐는데. 누군가가 몰래카메라라며 까꿍 하고 나타나길 바랐는데.


 “저 진짜 오늘 비행기 못 타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게이트 앞 직원에게 물었다. 그렇단다. 보시다시피 방금 막 떠났단다.

 “출국을 못 하셨으니까 다시 입국하셔야 돼요. 그건 면세품이죠? 면세품도 환불받으셔야 하고요.”

 ‘장난이 너무 심하셔요!’라고 팔뚝을 꼬집으며 투정이라도 부리면 ‘힝, 속았죠?’라며 없던 일로 해줄까 싶기도 했지만, 절대 거짓일 리 없는 표정을 짓는 직원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추위에 떨고 있는 불쌍한 새끼 강아지를 바라 보는듯한 표정. 땀으로 젖은 내 꼴은 정말 빗물을 뒤집어쓴 개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직원은 측은한 표정을 유지하는 한 편, 사무적인 태도로 출구 쪽을 향해 나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그 와중에 직원의 그런 이성적인 태도에 새삼 섭섭함을 느끼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기댈 곳이 없으니 낯선 사람의 친절이라도 갈구하게 되는구나.’

 직원을 따라 올해 가장 간절한 소원을 빌며 달렸던 그 길을 다시 밟으며 터미널 밖으로 향했다. 직원이 시키는 대로 면세점에서 구입한 담배 두 보루를 환불했고, 직원들만 드나들 것 같은 길을 통해 다시 입국 심사를 받았다.


 나는 다시 완전히 터미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어디서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체크인하며 부쳤던 커다란 캐리어 또한 어느 순간 내 품에 돌아와 있었다. 캐리어까지 받고 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게임이라면 목숨이라도 다시 차 있을 텐데. 달라진 거라곤 몇 배는 너덜너덜해진 멘탈 뿐이었다.



 현실 감각을 되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누구라도 옆에 있었다면 미친 듯이 울며 정신 줄을 놨을 일이다.

 나는 혼자였다. 나의 결단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위로보다는 현실적인 선택이 더 급급했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일단 티켓을 구입한 여행사에 연락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저 오늘 출발하는 비행기를 방금 놓쳤는데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전화를 받은 직원은 ‘잠시만요’로 뜸을 들이더니 두 가지 선택지를 내놓았다.

 첫 번째, 출발 날짜를 변경한다. 단, 변경 수수료를 물어야하며 당장 이 달 안에는 가능한 비행 편이 없을 수도 있다.

 두 번째, 놓친 비행 편을 취소하고 새 티켓을 예약한다. 마침 두 시간 뒤 출발하는 네덜란드 항공 비행 편이 있으며 가격은 140만원이다.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수법인데. 상대적으로 더 별로인 조건 A를 서두에 깔고 시작한다. 이거 내가 돈가스 팔 때 써먹던 수법이잖아. 막상 당하는 입장이 되고 나니 속수무책이다. 이미 여행의 상당 부분 예약을 마친 상황이라 오늘 당장 출발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돈과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140만 원짜리 티켓을 새로 사기엔 부담이 너무 크다. 더군다나 내가 놓친 비행기는 학생 특가라 환불도 안 된단다. 이러나저러나 일정한 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일은 불가피해 보였다. 고민 끝에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겠다 하니 방점을 찍는 상담사의 멘트가 날아왔다.

 “네덜란드 항공 티켓은 딱 한 장 남았으니 빨리 결정하셔야 돼요.”

 내 돈가스 판매 전략과 소름 끼치게 똑 닮은 그 멘트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쯤 되니 번뜩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도 못했다.

 동시에 오늘이 오기 전까지 ‘설마’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는 것을 연속으로 목격했던 나였다. ‘설마’했던 돈가스 절도 현장이 발각되었고, ‘설마’했던 스트라스부르행 티켓은 휴지조각이 됐으며, ‘설마’했던 잃어버린 지갑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을 못 가는 것 또한 충분히 현실이 될 만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숨이 턱 막혔다. 여행을 가지 못 한다니.

 돈가스와 떡갈비를 팔아댔던 지난 6개월이 떠올랐다. 내 힘으로 유럽 여행을 가보겠다고 아등바등 댔던 지난 6개월. 유니폼을 입은 거울 속의 낯선 내 모습부터 과일바구니와 팀장님의 따뜻한 포옹으로 기억되는 마지막 근무 날 까지. 지난 시간의 파편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만 열심히 살면 뭘 해도 성공하겠다.”

 일을 나가던 어느 새벽, 엄마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진짜였다. 나는 진짜로 열심히 했다. 간절했으니까.

 간절함은 지나치게 솔직한 현실 앞에서 이렇게 잔인한 얼굴이 되어버린다. 의미를 잃은 간절함 앞에서 생각했다. 이렇게 부족한 돈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홀로 던져져야 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닌 고문에 가깝지 않을까. 아무래도 다 망했구나.


 사실 이미 답은 나왔다. 어떻게 이 여행을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을 위해 쌓아온 시간과 노력만 해도 단순한 여행 그 이상의 의미인데. 

 이상하게 설렜다. 불안했지만 기대되기도 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이 상황이 재밌었다. 드디어 미친 건가.

 처음이란 두려움과 설렘의 끝없는 교집합. 유럽도 처음이지만 비행기를 놓친 상황도 처음. 이 ‘처음’으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설렘에 흥분하고 있는 나였다. 변태 같지만 불행 중 유일하게 다행인 일이었다.

 도달한 결론은 하나. 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 여행은 가야만 한다. 티끌만 하게나마 존재하는 설렘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가장 가까운 ATM으로 향했다. ATM 화면 위로 여행사에서 받은 문자에 적힌 계좌번호를 꾹꾹 눌렀다. 23년생에 가장 큰 숫자의 계좌 이체, 일백사십만원, 전송 완료.


 ‘설마’ 했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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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ct : shun-y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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