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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ug 24. 2020

미친듯이 외로운 게 잘못

멈추지 않는 불안한 생각들

 믿기지 않았다. 공항에서 당일 티켓을 사게 되다니.

 ATM에 140만원을 입금하고 나니 E-티켓 발권 안내 문자가가 날아왔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충분히 여유 있었지만, 앞서 겪은 엄청난 쇼크와 또다시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서둘러 수속을 끝내버렸다.


 공항은 어느덧 정오를 넘어 뜨거운 햇살로 가득 들어찼다. 공항에 막 도착했던 새벽과 달리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리 없는 나였다.

 종이 인형처럼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이끌고 새로운 게이트를 찾아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담배를 구입했던 그 면세점 앞을 지나쳤다.

 '담배를 사면 이틀은 굶어야겠지.‘

 친구 선물도 살 수 없는 현실에 또 한 번 좌절했다.


 공항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모든 것이 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았다. 탑승까지 남은 두 시간. 그래, 새 비행기 놓치지나 않게 얌전히 여기 앉아 기다리기나 하자.

 그 와중에도 혹시 게이트를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싶어 티켓과 게이트 번호를 끊임없이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 내가 떠나는 게 당최 여행인지 극기 훈련인지. 나 자신이 어쩐지 안쓰럽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온 건 모두 내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인데. 탓할 사람이 없어서 더 짜증났다.

 가방 깊숙이 넣어놨던 노란 노트를 꺼냈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적어 내릴 줄 알았던 이번 여행의 일기장이다.

 펜을 꺼내 들어 무언가를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마치 죽음을 종전에 앞둔 모차르트처럼. 약간의 침착함이나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왜 레퀴엠을 쓰는 기분인 걸까.


 불안한 생각은 비행기를 타서도 멈추지 않았다.

 3-4-3 배열의 좁디좁은 이코노미석, 그중에서도 장시간 비행 중 여간 불편한 자리가 아닐 수 없는 맨 끝 창가 좌석으로 배정받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그나마 마음을 조금은 달래주는 것 같았다.

 사실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이었다. 언어가 통한다면 누구라도 붙잡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새벽에 도착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고 새 티켓을 구입 해 여기 앉아있기 까지, 반나절 만에 일어났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스펙터클한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만 했다.

 마침 바로 옆 자리엔 한국인 중년 부부가 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레 내 얘기를 꺼내보았다.

 "사실 저, 아까 비행기를 놓쳤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내게 어떤 폭풍과도 같은 일들이 지나갔는지 줄줄이 소시지처럼 풀어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인사를 받아준 부부의 인상 또한 세상 인자했다. 그래, 이 부부라면 내 이야기에 공감해 줄 거야. 어쩌면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그렇게나 액땜을 했잖아! 이제 보상 받을 때도 됐어. 그러나 아주머니의 짧은 대답으로 이 대화는 종료되었다.

 "아, 네."

 아, 네...?

 아니, 어떻게 이런 반응 일 수가...! 저기요, 아주머니. 비행기를 놓쳤다고요! 버스나 기차도 아니고 비행기를, 무려 비행기를 놓쳤다고요! 최소한 '어머' 정도의 감탄사 정도는 해 주셔야죠! 아, 네 라니..., 아, 네 라니....!


 용기 내어 입을 뗐지만 돌아온 건 아, 네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갑자기 비행기를 막 놓쳤던 그 순간 나를 엄청 불쌍하게 쳐다봤던 게이트 앞 직원이 그리워졌다. 비록 빠르고 정확하게 나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프로 정신을 발휘하던 그녀였지만(그래서 잠깐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공감해준다는 것만으로 작지 않은 위로가 되었었다.

 그러나 감히 누구를 탓하겠는가.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 건 나인데. 그러니 아, 네라는 두 글자가 많이 섭섭해도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게, 굳이 새 비행기를 탄 게, 미친 듯이 외로운 내 잘못이다.

 거짓말이다. 갑자기 인상 좋던 부부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이 수면 안대를 끼고 잠에 곯아떨어진 동안 코에 대고 방귀라도 뀌고 싶다. 아니면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시트에 코딱지라도 묻혀놓고 싶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사람들에게 왜 20년 가까이 왕래가 있던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같은 친근함을 느낀 것인가. 그리고 나는 왜 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대했는가.

 나는 마치 짝사랑에 실패한 사람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부부를 증오했다. 오랜만에 떠나는 둘 만의 여행에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의 속사정을 이해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고독해지는 일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13시간 동안 나도 옆 자리의 부부도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밀폐용기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넣어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냉장고 깊숙한 곳에 처박힌 밀폐용기 말이다. 나는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이지 않는 오래된 반찬이다. 차게 식은 내 몸 여기저기선 곰팡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간혹 다가온 승무원의 사무적인 미소와 친절함에 기대며 터질 것 같은 서러움을 간신히 붙잡았다. 뭐라도 뱉어내지 않으면 그냥 죽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다시 노란 일기장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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