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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ug 31. 2020

입에 발린 달콤한 위로라도 괜찮아

구걸을 해서라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기 전까지 일기장을 세 번 펼쳤다. 악몽에서 깼을 때, 불현듯 떠오른 불안한 미래에 숨이 턱 막혀 올 때, 비행기를 놓쳤던 과거의 나를 간절히 죽이고 싶을 때.

 여행은 보통 설렘과 행복을 상징하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여행은 일반적인 의미의 여행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만약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테러범이 항공기를 납치한다면? 돈이 없어서 노숙해야 한다면?’

 나의 여행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비약적인 암담한 미래에 마구잡이로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생각을 멈추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끔찍한 악몽 때문에 금방 깼다. 기내 모니터에 제공되는 영화나 게임 따위도 당연히 별 도움이 되어주질 못했다.

 그래서 일기를 썼다. 무언가를 적어도 바뀌는 게 없단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말동무는 일기장 뿐 이었다.


 나의 일기. 시궁창이 되어버린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던 몇 시간 전의 나를 붙잡고 거칠게 분노를 표출한다. 이 부분은 글씨체도 개발새발이다. 마지막은 결국 바뀔 건 아무것도 없다며 하염없이 슬퍼한다. 그래도 마무리는 늘 긍정적이다.

 ‘런던에 도착하는 순간, 이 모든 걸 전부 보상받을 수 있을 거야. 힘내자!’

 묘하게 낯설지 않은 마지막 문장이다. 그러고 보니 카메라 플래시가 망가진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했었지. 이것 또한 액땜이라고. 그럼 이 또한 마지막 액땜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다음은 뭘까. 아아, 역시 그건가. 항공기 테러.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그런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 이리도 열심히 살았던 거구나. 열차 티켓을 잘못 예매했을 때,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카메라 플래시가 망가졌을 때, 비행기를 놓쳤을 때! 미리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비행기 폭파를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여행 따위는 일찍이 접으라는 경고였다는 걸. 원래 열심히 살긴 했지만, 어쩜 나는 그런 순간마저 그리 열심히도 경고를 무시했을까.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일기장에 일기를 쓸 게 아니라 유서를 써야겠다.


 그 순간 누군가 말 한마디라도 건네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확신하건대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너덜너덜해진 기분에 반창고 정도는 붙여졌을 것 같다.

 억지로라도, 빈말이더라도, 낯선 사람한테서라도 ‘괜찮아요, 다 잘 될 거예요.’라는 말 한 마디 들었다면. 살면서 그 말 한 마디가 그리 고팠던 순간도 없었던 것 같다.

 괜히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친절을 구걸하고 실패하고 혼자 상처 받았다. 결국엔 일기장 까지 꺼내서 나에게서라도 위로 한 방울만 적선 해주십사 하고 앉아있다.


 때로는 확신이 없더라도,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더라도 밑도 끝도 없는 달콤한 응원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괜히 현실적인 조언이랍시고 그렇지 않아도 암담한 미래에 재 뿌리지 말고 차라리 입에 발린 달콤한 응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미래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말 절박한 사람에겐 속이 텅 빈 응원이더라도 큰 위로가 될 수 있으니. 그렇다고 옆자리 부부가 밉다는 건 아니에요. 아니, 사실 조금 미웠어요. 아주 쪼끔.


 어느새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눈에 힘을 주고 다음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공항은 생각보다 굉장히 작았고 조명은 어두웠다. 어둡고 누런 조명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노란색으로 보였다.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아 기름진 얼굴 위로 찬물을 끼얹었다. 누런 조명 아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가뜩이나 노랗게 질린 얼굴을 더 누렇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잔 지 24시간 째다. 몸에서 썩은 악취가 풍기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게이트 앞 의자에 찾아가 앉았다. 다음 비행기를 탑승하기까지 남은 시각 3시간. 혹시나 또 잘못 온 건 아닌지, 비행시간은 맞는지 수십 차례 확인하며 몰려오는 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짧지 않은 기다림 끝에 비행기가 도착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기내에 탑승했다. 무사히 마지막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대로 완전히 곯아떨어져버렸다. 집을 나선 지 30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청하는 제대로 된 잠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분주한 주변의 인기척에 놀라 깨어나 창밖을 보니 마침내 도착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도착했을 여행의 첫 도시, 런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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