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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Sep 07. 2020

너무나도 노골적인 현실

가난한 여행자의 여행법

 런던에서의 첫날.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과 기분 좋은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커튼 사이로 살짝 비친 낯선 바깥 풍경 덕에 이 곳이 어느 곳 인지를 깨달았다.

 ‘아, 나 어제 런던에 왔구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니 부엌 쪽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서 반쯤 머리가 벗겨진 누군가가 거실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아, 나 어제 이 낯선 외국인 집에서 잤지.


 지난밤, 30시간의 사투 끝에 드디어 도착한 히드로 공항에는 나를 마중 나온 영국인 아저씨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나의 첫 카우치 서핑 호스트다.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은 여행자를 위한 숙박 셰어 플랫폼이다. 비영리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돈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돈을 받지도 않으면서 왜 낯선 외국인을 데려다 제 집에서 재우는 거야?’라는 의심이 들만도 한데, 경험해본 결과 그 이유는 매우 다양했다. 외국인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낯선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서, 간접적으로나마 여행 기분을 내고 싶어서.

 어찌 됐든 물가 비싼 유럽에서 카우치 서핑은 숙박비를 아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동시에 현지인의 문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카우치 서핑을 선택한 이유다.


 사실 카우치 서핑도 새로 산 비행기 표처럼 홧김에 지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돈이 없으니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 심지어 한평생 외국인과 마주해본 경험도 없다. 영어는 윤선생님이 알려준 게 전부다.

 그래서 어색하고 서툴렀다. 공항에서 다니엘 아저씨를 처음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의미 없는 웃음만 흘렸다.


 집에 도착한 늦은 밤, 아저씨는 나를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4박 5일 동안 내가 지낼 방이라고 했다.

 방의 한쪽 벽면엔 그의 집에 머물렀던 손님들의 사진이 한가득 붙어있었다. 어째서인지 대부분이 내 또래 남자 애들 뿐이었다. 침대 위 선반엔 대한민국 국기가 빳빳하게 프린트 되어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그의 센스 덕에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가족들에게 잘 도착했다고 안부를 전했다. 그리곤 그대로 침대 위로 픽 쓰러졌다.

 죽은 듯이 몇 시간을 잤을까. 깨어나니 나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런던의 낯선 아침이었다.


 다니엘 아저씨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아침 식사를 건넸다. 정장을 차려입은 것을 보니 누가 봐도 곧 출근 할 모양새다. 낯선 런던의 일상을 가까이서 보는 것 같아 왠지 설렜다.

 런던에서의 첫 식사, 메뉴는 바싹 구운 베이컨, 해시 포테이토, 써니 사이드 업과 베이크드 빈. 전형적인 런더너의 아침인 것 같았다. 해동이 다 되지 않은 해시 포테이토의 뜨겁고 찬 기운이 입 안에서 질서 없이 뒤섞였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런던이니까.


 대충 배를 채우고 다니엘 아저씨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출근하는 길이니 지하철역 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사실 더 자고 싶었는데, 남의 집이니 무리한 부탁이지는 않을까 지레짐작 해 말을 아꼈다. 덕분에 반 강제적으로 아침 일찍 지하철 역 앞에 나 홀로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역 근처의 커피숍으로 들어가 가장 저렴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낯선 지폐와 동전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주섬주섬 건네던 중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직원이 알아서 동전 몇 개를 가져갔다.

 힘들게 계산을 마치고 지하철역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잠시 멍을 때리다 문득 뭔가가 떠올라 가방에서 노란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장엔 비행기를 놓쳤던 순간부터 지옥과도 같았던 비행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카페인 효과가 작동했는지 마비되었던 현실 감각이 빠르게 돌아왔다. 한쪽 구석엔 놓친 비행기 표가 빳빳하게 잘 붙어있었다. 갑자기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냥 기억 저편으로 밀어둬도 좋았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반듯하게 기록씩이나 해뒀을꼬.

 갑자기 눈앞의 작은 에스프레소 한 잔이 엄청난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전부 돈이다. 이 작은 커피 한 잔도, 카페를 벗어나 다른 곳을 가려고 해도 다 돈이다.

 런던에 도착했지만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너무나도 노골적인 현실이었다. 이 당연한 사실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잔인할까. 이 돈으로 두 달 동안 버틸 수 있을까. 우선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러시아워가 지나고 나면 반값으로 저렴해진다는 지하철 티켓을 기다리는 일 밖에 없다.


 러시아워가 끝날 시각에 맞춰 개찰구에서 티켓을 구입했다. 8파운드. 약 15,000원. 이 또한 돈이다. 무슨 지하철 티켓이 이렇게 더럽게 비싼가 싶었지만, 하루 종일 망설이다간 이 동네의 망부석이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막상 지하철에 타긴 했지만 어딜 가야 하나 싶었다. 런던에 온 이유는 오로지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다. 나름 뮤지컬 전공생인데, 런던까지 와서 웨스트엔드에서 이 작품은 봤다는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일부러 일정 또한 8박 9일로 잡았다. 하루에 하나씩 총 8개의 뮤지컬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것이 내가 런던을 계획한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뮤지컬은 무슨, 밥도 못 챙겨 먹을 팔자다. 내가 날려버린 130만원이면 뮤지컬 여덟 작품을 보고도 남았다.


 결국 나는 Baker street이란 역에서 내렸다. 이유는 달리 없다. '빵집 거리'라니. 귀엽잖아.

 답을 모르겠을 땐 귀여운 게 답이다.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중 가장 귀여운 것을 선택하라. 결과가 나쁘더라도 위안을 삼을만한 귀여움이 있기에 괜찮을 것이다.

 때문에 별다른 계획이 없던 나의 런던 여행 첫 코스는 '빵집 거리'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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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ct : shun-y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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