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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Sep 14. 2020

런던의 신사는 레슬링을 한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세요

 부서졌던 나의 멘탈은 차츰 회복되었다. 물론 한 이틀 동안은 날려먹은 돈을 생각하며 쓰린 속을 달랬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빠르게 독자적인 여행 방법을 찾아가는 나였다.

 웬만하면 대중교통 대신 도보로 다닌다. 10km는 당연히 걸어갈 거리, 가끔은 20km가까이도 걸었던 것 같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 대신엔 무료 공원과 무료 갤러리를 이용한다. 다행히도 영국 대부분의 갤러리는 무료였다. 배가 고프면 샌드위치, 오렌지 주스, 감자칩으로 구성된 테스코의 3파운드짜리 샌드위치 세트를 먹는다. 외식은 아예 염두에도 없다. 외식도 못하는 낭만 없는 여행이 무슨 여행이냐 한다면 타워 브릿지가 잘 보이는 템즈 강변의 벤치로 가자. 석양이 지고 있을 때를 택했다면 그대는 배운 사람.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샌드위치 한 입 베어문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는 이름 모를 아티스트의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와줘야 한다.


 다니엘 아저씨 또한 내 멘탈을 케어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공항에 나를 마중 나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아침과 저녁을 챙겨주는 것은 물론,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며 여분의 휴대폰까지 빌려줬다. 주말엔 휴일을 반납하고 본인 차로 런던 근교를 여행시켜주기도 했다.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의 황송한 호의였다.

 가끔은 그런 호의가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도대체 부탁하지도 않은 내 속옷은 왜 빨아놓는 걸까. 뜻하지 않은 선물을 챙겨줄 때도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단순한 호의 그 이상이라 느낄 때마다 '역시 영국은 신사의 나라인가 봐'라고 되뇌었다. 그의 친절을 오해하지 말자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럼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wrestling? (레슬링 할까?)"

 레슬링. 그에겐 레슬링이라는 독특한 취미가 있었던 것이다.


 

 레슬링은 짐을 풀었던 첫날부터 그가 내게 제안했던 게임(?)이다. 사실 원래 그의 프로필에 적혀있었다. 본인의 집에 초대된 손님은 자신과 레슬링을 해야 한다고. 긴장을 푸는데 레슬링만큼 좋은 놀이도 없다는 그럴듯한 설명도 덧붙였기에 나도 처음엔 의심 없이 제안에 응했다.

 그는 첫날부터 예고도 없이 달려들어 나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곤 이런저런 이상한 기술(?)들을 쓰며 레슬링을 이어나갔다. 레슬링에 전혀 취미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알 것 같았다. 이건 레슬링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부대낌(?)이란 것을. 문제는 그 부대낌이 내겐 전혀 재미있지도 유익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약간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쾌한 감정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원체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허허 웃으며 그의 기분을 맞춰줬다. 집주인의 말을 거역(?)했다간 집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단 걱정도 있었고.


 레슬링만 빼면 참 완벽한 호스트였지만 그는 이튿날 밤에도, 셋째 날 밤에도 나를 거실에 앉혀놓고 레슬링을 하자고 졸라댔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걸어 다녀 녹초가 되었는데 레슬링을 하자고 졸라대니 정말이지 곤욕이 따로 없었다.

 그쯤 되니 레슬링이 영국의 보편적인 문화 같은 것인가 싶어 몰래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과 레슬링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는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존중해줘야 하는 다니엘 아저씨의 평범하지 않은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맘이 편하겠다 싶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다니엘 아저씨가 소개해준 피터 할아버지와 함께 셋이서 런던의 근교로 여행을 다녀온 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부슬비는 오후가 되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우비를 쓴 채 바람과 비를 맞으며 걸어 다녔다. 거기에 맥주 한 잔까지 걸쳐 우리 모두 천근만근이 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피터 할아버지는 90세에 가까운 완전 할아버지였다. 같은 이야기도 세 번쯤은 해야 알아들을 정도로 노쇠한 몸이었으니 그 피곤함이 나의 몇 십 배는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누워 버렸고, 다니엘 아저씨는 그런 할아버지를 내가 쓰던 손님방에서 재워야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마지막 날 나의 잠자리가 다니엘 아저씨 침대 옆 방바닥이 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 불안했다. 같은 방이라니. 침대 옆이라고 해도 왜 하필, 마지막 날, 같은 방에서, 늦은 밤, 단 둘이...? 그리고 늘 그랬듯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지 않은가.

 그래서 그날따라 더 오래 씻었다. 내친김에 세면대에 밀린 빨래를 쏟아 넣고 손빨래까지 했다. 방에 늦게 들어가면 아저씨가 잠들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 시간이 지났을까. 퉁퉁 불어 쭈글쭈글 해진 손으로 샤워실 문을 열고 나와 도둑발로 들어갔다. 진작 잠 들었을 아저씨가 있는 불 꺼진 방 안으로.

 순간 정말 기절할 뻔했다. 아저씨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저씨는 피곤한 얼굴을 투박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씻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 물었다. 레슬링 하자고 할까 봐요, 라는 속마음 대신 ‘손빨래 까지 하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아저씨는 자신한테 미리 얘기하지 그랬냐며 손가락으로 이불을 깔아놓은 방바닥을 가리켰다.

 “늦었으니까 얼른 자.”

 후우, 그래, 그냥 마지막 날 밤이니 굿나잇 인사나 하려고 기다렸나 보구나. 내가 또 런던 신사의 호의를 이렇게 오해할 뻔 했구나. 이불속에 몸을 집어넣고 눈을 질끈 감았다.

 “굿나잇, 다니엘!”

 이제 내일 밤부턴 그토록 곤란했던 레슬링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안심하며 긴장을 풀고 잠 들 준비를 했다. 그런데 순간, 내 귀를 의심하는 단어가 들렸다.

 “Wrestling?”

 미친. 이 밤중에 무슨, 그것도 자려고 다 준비한 상태에, 바닥에 이불까지 다 깔아놓고선, 게다가 속옷 차림을 하고 있으면서 무슨 레슬링? 미치셨어요? 머릿속에 당혹스런 감정들이 갓 튀긴 뜨거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저 너무 피곤해요."

 힘들게 거절 의사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아저씨의 용기에 기름을 부은 걸까. 마지막 날인데, 마지막이니까, 언제 또 만날지도 모르니, 마지막으로 딱 '10분'만 레슬링을 하자며 끈질기게 매달리는 아저씨였다.

 결국 시작되었다. 한 밤 중의 레슬링.


 아저씨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내 위에 올라탔다. 곧바로 내 몸을 뒤집으려 덮쳐오는 그의 양 팔을 반사적으로 붙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힘을 실어 팔을 힘껏 밀어내자 아저씨는 한 쪽 눈썹을 치켜든 ‘제법인걸?’이란 표정으로 다시 다가왔다. 참 꼴불견이었다. 속으로 온갖 육두문자가 쏟아졌지만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웃으며 그와 몸싸움을 지속했다.

 ‘그래, 십 분이랬잖아. 얌전히 기분 맞춰주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도망가자.’

 길고 긴 몸싸움 끝, 마침내 그는 내 위에 올라타 나의 두 팔을 꽉 잡았다. 그의 아래 깔려 팔까지 붙잡힌 나는 옴짝달싹 못하는 꼴이 되었다. 질끈 감고 있던 실눈 사이로 그의 얼굴을 살 폈다. 그 순간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그는 내 배 위에서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깔아뭉개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해 댔다. 그의 엉덩이가 내 배를 세게 누를 때마다 얇은 트렁크 팬티 안의 뜨겁고 묵직한 것이 자꾸만 나의 배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일전의 레슬링, 그러니까 이 집에서 경험한 지금까지의 레슬링과는 차원이 다른 불쾌함이었다.

 ‘이 인간, 아무래도 오늘 아예 작정한 모양이구나.’

 자신감이 붙었는지 이제는 내 귀에 대고 뜨거운 입김도 불기 시작했다. 불쾌한 바람은 귓구멍을 타고 온몸을 쑤셨다. 이제는 귓바퀴와 귓불도 만진다. 환장하겠다.

 멜로눈깔을 한 그는 ‘런던은 어땠냐’, ‘다음 여행지는 어디로 정했냐’, ‘다음에 또 런던에 올 계획이 있냐’는 등의 의미 없는 질문들을 퍼부어댔다. 허공을 떠도는 질문들도 고갈됐는지 마침내 그는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나랑 잘래?”


 아저씨를 밀어내고 밖으로 도망가? 그랬다가 갑자기 내 뒤통수에 대고 총을 쏘면 어떡하지? 근데 영국은 총기 소유 안 되지 않나? 아, 평소에 영드라도 봐둘 걸. 근데 도망간다 해도 이 밤중에 어디로 가지? 나 지금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와중에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던 건 아닐까, 런던의 신사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나를 강간할 리는 없지 않나 하는 합리적인 사고를 시도하는 나의 답답한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기도 했다.


 “죄송해요.”

 결국 최대한 조심스럽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 쉬더니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는 그의 얼굴은 귀 끝까지 붉게 번져있었다. 당황한 얼굴이 되어선 아까처럼 속이 텅 빈 질문들을 해대다 본인 침대로 올라가 잠들었다. 십 분은 무슨. 열 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방 안으로 적막이 찾아왔다.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생쥐처럼 잔뜩 웅크린 채 밤을 지새웠다. 낯선 땅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내 기대와 전혀 다른 목적이었다니. 온몸이 떨렸다. 엄청난 배신감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여행을 떠난 걸까. 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낯선 외국인을 믿고 그의 집에서 자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걸까. 역시 망한 여행은 끝까지 망한 여행인 건가. 다시 밀려오는 걱정 속에 벌써 날이 밝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빛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내 기분이야 어떻든 해는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뜨고 있었다. 여기가 한국이면, 내 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거실로 나가면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이 있을 텐데.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문득 떠오르는 아빠, 엄마, 누나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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