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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Sep 21. 2020

동물을 좋아하지만 먹는 걸 좋아하진 않아

채식하는 스미스 아저씨

 열차 안, 나는 다시 노란 일기장을 꺼냈다.

 밤을 꼬박 새고 일어나 그 집을 벗어나기까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내가 겪은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도무지 무슨 정신으로 빠져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분이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겠단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호스트도 아저씨다. 은퇴 후 런던의 교외에서 혼자 사는 60대 아저씨. 카우치 서핑으로 쌓인 데이터는 어젯밤 있었던 그 일이 전부인데, 혼자 사는 아저씨 집에 제 발로 찾아가는 게 맞는 일인가 싶었다.

 심지어 그가 사는 동네는 런던 중심에서도 한참 떨어진 Deptford라는 곳이었다. 서울로 치면 구로구 같은 느낌이랄까. 현지인보다 외국인들이 훨씬 많고 중국어로 된 간판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동네였다.

 집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기 전까지도 망설였다. 그를 특정 하는 정체성으로 미리 재단하는 게 과연 맞는 행동인 걸까? 나를 지키기 위해선 내 경험을 토대로 위험한 상황은 미리 방지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단 한 번 겪어본 카우치 서핑 경험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엔 너무 비약적인 결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아저씨의 프로필에는 레슬링 같은 취미가 없다. 그것만으로 참 다행인데. 에라, 모르겠다.

 ‘띵동’

 차라리 아무도 안 나왔으면 좋겠다. 막연한 공포심에 모순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던 찰나,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민트색 폴로티와 흰색 반바지 차림에 곱실거리는 은발과 수염, 푸른 눈동자와 푸근한 인상을 가진 커다란 아저씨, 스미스였다.


 인사 후 아저씨는 자신과 집을 소개했다.

 집은 전형적인 런던의 주택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방이 나오는 구조였다. 현관인 1층을 지나 2층에는 거실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이,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간 3층에는 침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화이트 톤의 깔끔한 인테리어, 깨끗하게 정돈된 가구와 식기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르른 녹음과 바닥 위로 번진 햇볕. 이 동네와 집을 선택하고 공간을 꾸며놨을 스미스 아저씨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층의 침실은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아들이 쓰는 공간이라고 했다. 동시에 오늘 내가 지낼 곳이다. 마음에 쏙 들었다. 문을 열면 눈앞에 그림 같은 창이 걸려있다. 창밖으로는 푸르른 풀밭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이 보인다.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협소한 크기지만 눕는 순간 커다란 창밖의 하늘이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공간이다. 밤이면 이 침대에 누워 별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집에 오기까지 수십 번 고민했던 스미스 아저씨를 향한 의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 소개가 끝나자 아저씨는 밥을 차려주겠다며 나를 식탁 앞에 앉혔다. 냉장고에서 샐러드와 요거트, 우유, 호밀빵 같은 것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놨다. 문득 떠올랐다. 그의 프로필에 적혀있던 ‘베지테리언’이라는 단어가.

 “아저씨는 왜 채식을 하세요?”

 이런 질문에 도가 튼 듯한 그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동물 좋아하니?”

 “네, 완전 좋아하죠!”

 “나도 동물을 좋아해. 그렇지만 먹는 걸 좋아하진 않아. 너를 좋아하지만 먹을 순 없는 것처럼 말이야. 껄껄.”

 농담 섞인 답변에 나도 웃어 넘겼지만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졌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왜 육식을 하냐’고 묻지 않는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먹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다수의 편에 섰다고 해서 모든 게 당연한 건 아니다. 호기심도 마찬가지다. 호기심 섞인 가벼운 질문은 충분히 일방적일 수 있다. ‘왜 그래요?’라고 묻기 전에 미리 찾아봤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쩌면 무의식중에 내 생각이 당연한 정답이라 여겼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나의 일상에서도 이런 경험이 적지 않다. 여러 상황에서 쉽게 소수가 되는 경험을 했던 나였다. 무지를 기반으로 뱉어진 가벼운 호기심에 처음엔 일일이, 친절히 대응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빠르게 피곤해졌다. 나중엔 질문 자체가 무례한 태도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스미스 아저씨에게 그렇게 비춰졌을까 싶어 아차 싶었다. 괜히 민망해 애꿎은 요거트 그릇 바닥만 싹싹 긁었다.


 

 늦은 점심 후 간단하게 짐을 꾸려 집 밖을 나섰다.

 낯선 도시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로 도쿄에서 한 달간 지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마주한 일상 풍경은 관광지보다 훨씬 매력적인 그림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가끔씩 그때의 조각들이 수면 위로 동동 떠오른다. 여행을 꿈꾸게 된 것도 어쩌면 그 조각들로부터였는지 모른다.

 Deptford는 런던 여행을 계획 중인 사람이라면 전혀 찾을 것 같지 않은 평범한 동네였다. 그래서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발코니에 빨래 너는 할머니와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대지를 덮은 푸른 공원과 공을 쫓는 귀여운 골든 리트리버, 소다맛이 날 것 만 같은 청량한 하늘과 빈티지한 아이스크림 트럭. 그들에겐 일상적일 모든 것이 특별한 조각으로 가슴에 새겨졌다. 도쿄에서의 그때처럼.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아저씨가 준 위스키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반쯤 열린 창 틈 사이로 따뜻한 밤바람이 불며 하얀 커튼이 일렁였다. 위스키 한 잔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기분이 좋아져 평소 좋아하던 팝송도 한 곡 불러드렸다. 아저씨는 저스틴 비버 같다며 박수를 쳐줬다. 그러더니 먼지 쌓인 올드팝 씨디를 꺼내 틀어놓고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불뚝 나온 배를 잡고 뒤뚱거리며 춤추는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워 한참을 웃었다.

 한참 놀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졌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견디기 힘들어 인사를 드리고 3층으로 올라왔다. 창밖엔 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별들이 총총 박혀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켜켜이 쌓여있던 묵은 때를 벗겨 내듯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냥 망하라는 법은 없구나.”

 그날 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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