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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Feb 15. 2021

훔친 건 없지만 도둑입니다

프랑스 리옹에서 도둑으로 몰린 사연

 아침에 일어나니 한 부부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안시의 카우치 서핑 호스트였다. 내가 요청한 3일은 힘들지만 이틀 정도 재워줄 수 있다고 했다. 오늘 밤 잘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시로 가는 떼제베에 몸을 실었다. 중간에 리옹에서 내려 갈아타야 하는 일정이다. 막상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왔다.

 멘토가 되어줬던 누나의 뼈를 때리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은 욕구는 턱 끝까지 차올랐는데 막상 불을 지필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와 타협한 결론인 열차 이동이 찝찝했다. 아마 그 찌질함이 계속해서 밀려오는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의 원인이었을 테다.


 콜마르는 제이 누나로 기억될 도시다.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누나는 내게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불씨가 되어주었다. 정해진 규칙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한다, 착하다는 평가를 듣고만 살았던 나의 세계에 던져진 새로운 물음이자 숙제였다. 누나 앞에만 서면 발가벗은 아기가 되어버린 듯했던 기분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우연히 라도 누나를 다시 만난다면, 지금보다 더 성장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리옹에 도착했다. 갈아타는 열차까지는 약 4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나와 제법 출출했다. 구글맵을 검색해보니 가까운 거리에 대형마트가 있었다. 40분이라는 시간이 조금 애매했지만 서둘러 다녀오면 간단하게 먹을 것들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다음 열차나 기다려. 라고 소리치는 나의 깊은 내면 속 자아(아마 비행기를 놓치면서 태어난 녀석 같다)를 외면해선 안 되었다. 결국 여기서 또 하나의 어이없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마치 영화 같았다. 복선까지 어쩜 그렇게 완벽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이어져 있었다.

 낑낑대며 캐리어를 끌고 까르푸에 도착한 나는 갈릭 크림치즈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에 머물 때 현과 함께 먹었던 그 갈릭 크림치즈다.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또 사 먹고 싶었는데 그게 꼭 그날이어야 했었나 보다.

 매장은 생각보다 너무 커서 거의 달려 다니면서 크림치즈를 찾아 헤맸다. 드디어 그 크림치즈를 찾아 카트에 담았고, 콜라 한 병과 바게트도 함께 들고 계산대로 뛰어갔다. 열차 시간까진 약 20분 정도 남아있었다.

 앞서 계산하고 있는 손님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손님이었던 아주머니는 일주일치 장을 한꺼번에 보셨는지 벨트 위에 물건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기 시작했다. 캐셔 아주머니는 또 왜 이렇게 여유로우신 건지, 물건들에 마사지를 해주듯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이전 손님 계산 마치기도 전에 다음 손님 물건에 바코드를 찍는 스피디한 우리나라 마트 계산 풍경과 사뭇 달라 당황스러웠다.

 아주머니의 계산이 끝나고 다음 손님인 아저씨 차례가 되었다. 아저씨가 사려는 물건은 하나뿐이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리 느리게 계산해도 여유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아저씨가 수표를 내민다. 그런데 기계가 수표를 못 읽기까지 한다. 캐셔 아주머니가 두 번, 세 번, 네 번 시도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열차 시간 까진 10분 남았다.

 결국 계산을 포기했다. 카트에 담은 물건들을 전부 제자리에 갖다 놓고(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과정이 그 큰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 진행됐음을.) 매장 밖으로 부리나케 뛰어가...려 했는데... 아아. 입구의 가드에게 붙잡혔다. 까만 경찰복을 입은, 나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두 명의 가드 아저씨. 없던 잘못도 고백해야 할 것 같은 비주얼에 압도당했다.

 가드 아저씨는  나의 파란 캐리어를 가리켰다. 아차차. 금방 상황 파악이 되었다. 커다란 가방을 갖고 매장에 들어갔다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급하게 뛰어 나가는 외국인 여행객은 절도범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조건이구나. 나는 결백했다. 아주 당당하게, 맘껏 뒤져보라며 캐리어를 내어주었다. 그런데 세상에. 캐리어 앞 주머니에서 뜯지도 않은 병맥주 세 병이 나오는 게 아닌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대체 저기서 뜯지도 않은 병맥주가 왜 나오는 거야?

 기억났다. 캐리어에서 등장한 정체 모를 병맥주의 출처.

 스트라스부르였다. 현과 마시기 위해 사다 놓았던 병맥주 한 짝, 결국 다 마시지 못해 아쉬운 표정을 짓자 현이 말했다.

 “가져가서 마셔.”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그럼 되겠구나 싶어 캐리어 안에 병맥주를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병맥주는 지금 내 눈앞에 있다. 커다란 덩치의 두 가드 손안에 말이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이게 뭐야?”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 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건 친구와 마셨던 맥주, 아니, 맥주와 마신 친구,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 매장에서 가져온 게 아니고..., 그렇게 쳐다보면 당장이라도 날 매장하실 것 같은데,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열차 출발까지 6분 남았다.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와버렸다.

 “아, 씨발!”

 “What?”

 “아, 노노. 쏘리. 애니웨이 암 비지!!!!”

 나는 손가락으로 손목시계를 가리켰다가 달리는 모션을 취했다가 하며 열차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온몸으로 설명했다. 거의 가족오락관이었다. 그러나 목석처럼 아랑곳하지 않는 두 명의 가드였다.

 둘은 맥주에 붙어있는 라벨 이곳저곳을 살펴보더니 무전기로 어딘가를 호출했다. 열차 출발까지는 5분 남았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이때부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냥 무릎을 꿇었다.

 “Please... I didn't still... That's mine!!!! (제발.... 나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그 맥주 내 거라고!!!!!)”

 이윽고 무전기로 답신을 받은 두 가드는 서로 중얼중얼 얘기를 나누더니 내게 다시 맥주를 건네줬다.

 “You can go.(가라.)”

 석방되는 기분이 이런 건가. 기뻐할 여유도 없었다. 출발 시간까지 3분 남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달리는 것뿐이었다. 비행기를 놓치기 전 인천공항을 트랙 삼아 미친 듯이 달렸던 그때처럼.

 나는 또다시 달렸다. 이번엔 크고 무거운 파란 캐리어와 함께. 캐리어를 끄는 것은 사치였다. 온몸으로 부둥켜 안은 채, 전쟁통에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 달리듯 정말이지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수많은 인파를 헤집고 나와 열차 플랫폼에 도착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가 타야 할 열차가 막 출발 신호를 울리고 있었다. 서둘러 몸을 실었다. 그제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비처럼 쏟아냈다. 손목을 들어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 1분의 오차도 없는 출발 시간이었다.

 곧바로 열차 문이 닫히면서 기장의 출발 멘트가 흘러나왔다. 창밖의 풍경은 점점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이 망한 여행, 이름 값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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