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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Feb 12. 2021

어디든 길은 있어

결과가 어떻든, 뭐든 시도는 해볼 수 있는 법

 교통 운이 지지리도 없다.

 출발부터 비행기를 놓쳤다. 고속 열차는 잘못 예약해서 10시간이 넘는 이동 거리는 버스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번엔 프랑스 철도청 파업이란다. 오늘은 한정적으로 일부 노선만 운영하며, 내가 예약한 아를 행 기차는 거기서 제외되었단다. 아를에 가고 싶으면 삼일 뒤에나 열차 운행이 재개될 것이며 그마저도 확실치 않단다. 여기까지가 누나가 전해준 매표소 직원의 말.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백지장이 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멍하니 서있는 내게 누나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지?”

 신이시여. 도대체 이 여행으로 제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는 겁니까. 놓친 건 비행기 하나로 족하지 않습니까. 설마 지금이라도 이 여행을 멈추라는 계시인 겁니까. 그냥 짐 싸들고 공항으로 갈까요? 아, 그런데 말이죠, 새로 구입한 비행기 표는 귀국 날짜 변경이 안 돼요. 돌아가고 싶어도 한 달 뒤에나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다.

 예상이라도 했다면 플랜 B, C라도 세워뒀을 텐데, 철도청 파업이라니. 전혀 예상도 못한 시나리오다. 어떻게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시나리오일 수 있담.

 “맥주 한 잔 마실까?”

 정신 줄을 놓은 내가 안쓰러웠는지(혹은 답답했는지) 보다 못한 누나가 입을 열었다.

 “가자.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어떻게 할지 생각 해 보자구.”

 카페에 도착해 바깥 자리에 앉았다. 저번에 마셨던 것과 같은 맥주로 주문을 마치고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훈아.”

 고개를 들어 누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정신 차려.”

 “...응?”

 “정신 차리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야?”

 이박 삼일 간 보았던 누나와는 조금 다른 모습. 정신 줄을 놓은 채 멍 때리는 내 모습이 답답했던 건지, 아님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 걱정 됐던 건지 누나는 평소와는 다른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너 오늘은 어디서 잘 거야? 우선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오늘 내 집에서 널 재워줄 수 있을 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무슨 일이 해결되니?”

 귀 끝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또 실수를 저질렀구나. 누나 앞에선 이미 한없이 작은 사람인데. 이로써 그 사실이 한 번 더 증명되는 것만 같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다.

 “아, 맞다. 미안해... 그걸 생각 못했네. 혹시 오늘 하루만 더 신세 져도 괜찮을까...?”

 “나한테 미안해하라고 한 얘기는 아냐. 물론 오늘이든 내일이든 집에서 재워줄 수 있어.”

 갈 곳을 잃은 나의 시선은 다시 바닥에 고정되어버렸다. 애꿎은 입술만 괜히 물어뜯었다.

 “정신 차리라고. 프랑스에서 철도 파업은 엄청 흔한 일이야.”

 이윽고 주문한 맥주 두 잔이 나왔다. 콜마르에 왔던 첫날, 누나가 추천해줬던 달콤한 맛이 나는 맥주였지만 어쩐지 쓴 맛만 느껴졌다.

 “꼭 열차로 이동해야 한다고만 생각하지 마.”

 “...그게 무슨 말이야?”

 “열차가 아니어도 된다구. 지금 당장 중고 자전거 하나 사서 자전거로 이동해도 돼. 자전거 중고로 사면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 걸어서 갈 수도 있고, 지나가는 차 붙잡아 탈 수도 있어. 유럽에선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많아. 잘 곳이 없으면 가까운 집에 가서 문 한 번 두드려봐. 생각보다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 되게 많을 걸? 나도 그렇게 많이 다녔거든. 어디든 길은 있어, 수훈아. 잊지 마. 뭐든 시도는 해볼 수 있는 법이야.”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왜 내가 정해놓은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여겼을까.


 남아있던 맥주잔을 깨끗이 비웠다. 고개를 들고 똑바로 누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방식의 여행. 염두에 둔 적도 없는 말도 안 되는 계획들. 무작정 자전거를 탄다고? 아니면 그냥 걸어서? 낯선 사람의 차를 얻어 탈 수도 있고, 무작정 가까운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려 볼 수도 있다니. 얼토당토않다 여겼던 이야기들이 당장이라도 곧 실현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세상에. 생각지도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선택지가 생겨 버렸다.


 

 역에서 가까운 자전거 매장으로 가 중고 자전거를 살피기 시작했다. 마음만은 벌써 자전거 여행으로 굳혀졌다. 마음에 드는 파란색 자전거를 골라 가격을 물었다. 생각보다 비쌌다. 하지만 남은 여행지들로 향하는 교통비와 비교하면 엄청난 세이브였다. 그럼에도 결정이 쉽지 않았다. 막상 자전거 여행을 현실이라 여기자 수 십 가지 질문들이 뒤를 따라왔다.

 ‘미리 예약한 교통편은? 또 그 돈 버리는 거야?', '너 불어는 잘해? 영어는?', '캐리어는 어쩔 거야? 그거 누나가 여행 선물로 사줬던 거잖아. 설마 자전거 조수석에 그게 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자전거 매장 밖을 나왔다.


 다시 무거워진 발걸음이 되었다. 또 한 번 스스로 타협한 것 같은 선택에 잠깐 주눅 들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막막하진 않았다. 누나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다음’을 선택해야만 했다. 아주 능동적으로.

 결국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언제 운행할지 모르는 아를 행 열차를 손 놓고 기다릴 순 없으니 다른 곳에 가기로. 물론 열차 운행이 가능한 곳이어야 했다.

 마음에 꽂힌 곳은 안시였다. 제이 누나의 도움을 받아 콜마르 역으로 다시 돌아가 안시 행 열차를 새로 티켓팅 하고 집에 돌아와 안시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호수로 둘러싸인, 프랑스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1위로 꼽혔다는 도시였다. 아를은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무렴. 이 또한 다시없을 경험이라 생각하니 제법 위로가 되었다.

 안시에 사는 카우치 서핑 호스트들에게 메시지를 미친 듯이 보내다 보니 어느덧 콜마르의 마지막 밤은 빠르게 저물었다.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어쩐지 큰 숙제를 껴안은 것 같았다.

 ‘어디든 길은 있어. 뭐든 시도해볼 수 있는 법이야.’

 누나의 그 한마디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 여행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 다음엔 도전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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