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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Feb 07. 2021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사람

처음 만난 한국인 호스트

 이제 콜마르로 간다. 스트라스부르에서 70킬로 정도 떨어진 당일 치기 여행도 가능한 가까운 지역 콜마르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콜마르에선 잠시 쉼표를 찍었던 카우치 서핑을 다시 하기로 했다. 호스트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유일한 한국인 누나, 제이. 나보다 한 살 많고 콜마르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프로필에 적혀있었다.

 제이 누나는 콜마르 역에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곧게 묶은 까만 머리칼, 햇빛에 그을린 피부, 오랜 시간 운동으로 단련한 듯한 탄탄한 체구와 선하지만 올곧은 느낌의 흑갈색 눈동자. 내가 느낀 누나의 첫인상이다.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길, 왠지 모를 강한 기운에 주춤한 나는 괜히 의례적인 질문만 던졌다. 이곳에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 맞다. 나이는 몇 살이에요? 프로필에 보니까 나보다 한 살 많았던 것 같은데. 그러자 돌아온 답변. 그거 알아요? 이곳에서 나이를 묻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었어요. 아차차. 예상 밖의 답변에 내가 당황하자 누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뭐라고 하는 건 아녜요. 그냥 좀 아쉬워서요. 나이를 말하는 순간 어느 정도의 관계랄까, 서열 같은 게 정리되는 느낌이잖아요.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과의 시작이 그런 식인 건 아쉬워요. 대답을 듣고 나자 어쩐지 예정된 콜마르에서의 이박 삼 일간의 일정이 결코 평범치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집 앞에 도착할 때 즈음 우리는 말을 놓은 채 대화하고 있었다.

 제이 누나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을 뿐인데 도저히 그 나이라고 믿기지 않는 관록을 가지고 있었다. 똑똑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나라를 오가며 살았다고 했다. 여행은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심지어 4개 국어 능력자였다. (그보다 더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대화를 할 때마다 깊이 있는 대답들이 쏟아졌다. 나와 내 또래 친구들에겐 관심 밖이었던 환경 문제나 종교, 사상에 관한 견해들도 대화 속에 자연스레 융화됐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어른 같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똑똑하단 사실을 떠나 행동 하나하나 전부 배우고 싶어지는, 닮고 싶은 어른 말이다. 결코 으스대는 법이 없었다. 대화를 할수록 속으로 아, 세상에, 맙소사를 외치게 만들 뿐이었다.


 콜마르의 어느 노상 카페에서 누나가 내게 물었다. 만나보고 싶은 뮤지컬 배우가 누구냐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가장 좋아하는 배우의 이름 석 자를 꺼냈다. 누나가 말했다. 한번 연락해봐. 응? 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누나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거든. 그 분하고 한 마디라도 나눠보고 싶어서 그 출판사의 편집장한테 전화해서 끝끝내 연락처를 받아냈었어. 그래서 진짜로 그 작가를 만났고 원하는 이야기도 나눴어. 안 될 게 뭐야?

 틀린 게 없는 말이었다. 내가 아무리 존경하는 사람이라도 그 역시 나와 같은 인간일 뿐이잖아. 내가 외계인을 만나겠다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 내게 안 된다는 편견을 떠안기고 있었던 걸까. 지금까지 금기라고 생각했던 무언의 약속들을 의심하게 된 순간이었다.


 누나는 비건 이기도 했다. 채식의 이유를 묻자(에드워드 아저씨 때와 달리 진심으로 궁금하여 물었다.) 난생 처음 듣는-아니, 어쩌면 관심이 없어 보고도 모르고 지나쳤을-환경 문제와 비윤리적인 축산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인도의 오로빌과 같은 ‘대안적 삶’을 살아가는 자급자족 공동체의 존재 또한 알게 되었다. 그간 내가 얼마나 좁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나 싶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시에 커다란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 들었다.


 

 누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누는 대화가 많아질수록 나는 점점 조용해졌다.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나와 겨우 일 년 차이일 뿐인데 그동안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를 건설해 놓은 누나가 마냥 대단했다. 나도 나 나름대로 나의 세계를 잘 구축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비교하기 시작하니 어쩐지 너무 형편없이 느껴졌다. 뺏어간 사람은 없는 데 뺏긴 것만 가득한 허무한 박탈감이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짐을 싸들고 콜마르 기차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마중을 나온 누나는 조심히 가라며 인사를 건넸다.

 다음 도시는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아를이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유명한 그곳이다. 고흐가 삶의 마지막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그의 생에서 죽음까지 발자취를 느껴보고 싶어 결정한 도시였다.

 허리춤에 맨 혁대 안에서 미리 인쇄해온 꼬깃꼬깃한 티켓을 꺼내 매표소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은 티켓을 받아들고 한참을 쳐다봤다. 이내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저으며 다시 돌려주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내가 우물쭈물 하자 뒤에서 보다 못한 누나가 다가와 직원과 불어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무언가 상황이 평범하진 않은 것 같았다. 설마 내가 또 예약을 잘못한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는데. 열 번도 넘게 확인했는걸. 또다시 비행기 노쇼의 악몽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 서늘한 공포, 또 느끼고 싶지 않아. 불길하다, 불길해. 불길한 예감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는데.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이윽고 직원과 대화를 마친 누나가 돌아와 말했다.

 “오늘 프랑스 철도청 파업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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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ct : shun-y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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