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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04. 2021

어색함도 여행의 몫

다시 친구가 되어가는 시간

 아침부터 배가 아파 눈이 떠졌다. 아무래도 지난밤의 나가사키 짬뽕이 원인인 듯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시원하게 뱃속을 비우며 현이 보내 놓은 문자를 확인했다.

 “9시에 네 기숙사 앞으로 갈게.”

 현재 시각 오전 8시 45분. 헐레벌떡 준비를 마치고 기숙사 밖으로 뛰어 나갔다.


 스트라스부르는 크게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눠져 있었다. ‘올드타운’이라 불리는 구도시는 몇 백 년이 넘는 성당과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는 관광지였고 신도시는 주로 스트라스부르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거 지역인 것 같았다. 현은 나를 관광지역인 올드타운으로 안내했다.

 어젯밤에 잠은 잘 잤는지, 아침은 먹고 왔는지 같은 스몰 토킹도 같이 걸은 지 십 분 만에 바닥을 보였다. 날씨도 우리의 어색한 공기를 읽었는지 당장 비라도 쏟을 듯 우울한 얼굴을 내비쳤다. 쿨한 성격의 현은 이런 분위기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슈퍼 눈치러인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사실 조금은 걱정했었다. 어색할 것이 분명하다고. 현과 나는 꾸준히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일정을 함께하는 동안 대화의 흐름이 끊기거나, 함께하기로 한 3일이 길게 느껴지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였다.

 올드타운이 가까워질수록 거친 콘크리트 바닥이 울퉁불퉁한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올드타운에 도착하자 그제야 내 입에서 자연스러운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현은 그런 나를 놓치지 않았다.

 “멋있지? 저 건물은 800년이 넘었어. 네가 밟고 있는 그 돌바닥도 마찬가지고.”

 그때부터 현의 가이드가 시작되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올드타운은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그냥 걷기만 해도 좋아. 동화 속 한 장면 같지 않아? 저기 독일식 건물들도 눈에 띄지? 독일이 엄청 가깝거든.  이쪽 지역을 통틀어 알자스 지방이라고 하는데 화이트 와인이 특히 유명해. 아, 아침부터 술 생각나네. 매해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마을 전체에 조명과 장식으로 꾸며 놓고 수제 간식 같은 걸 팔아. 작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뱅쇼 하나 샀다? 아, 뱅쇼 마시고 싶다. 이거 그때 찍은 사진이야. 진짜 예쁘지? 겨울에도 한 번 더 와. 마켓 열리는 시즌 즈음에.

 얘기를 하다보니 빵집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제일 유명한 빵집이야.”

 평소에는 줄을 서서 먹는다는 빵집엔 운이 좋게도 사람이 없었다. 갓 구운 바게트 빵을 품에 안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맛. 이렇게나 갑자기다. 기분이 좋아지는 거.


 정오가 가까워지자 날씨 또한 좋아졌다.

 스트라스부르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선 미사 합창을 들었다. 정말 우연이었는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웅장함을 느꼈다. (몇 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현도 처음 봤다고.) 점심으로는 슈크르트(양배추 절임 같은 요리로 알자스 지방의 김치랄까.)와 딱뜨 플람베(감자가 들어간 알자스식 피자)를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지만 익숙하게 맛있는 맛이었다. 그 식당에서 우리는 각자 맥주 두 잔씩을 비웠는데, 취기 덕이었는지 어느새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누고 있었다.

 다음날, 현은 내가 묵는 기숙사에 찾아와 제육볶음을 만들어줬다. 얼마만의 한식인가. 엄마가 챙겨준 소고기 볶음 고추장과(좀처럼 개봉할 일이 없어 버릴까 싶었는데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다.) 현의 요리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이 전 부인에게 선물한 공원이라는 오랑제리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기도 했다. 처량하게 부슬비를 맞는 꼴이기는 했지만 여행이기에 나름대로 낭만이 있었다. 어느덧 현과 나는 자연스럽게 많은 대화를 나눴다. 현의 전공이었던 영화와, 내 전공이었던 뮤지컬, 그동안의 근황과 연애사,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 까지. 어쩐지 새로운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어색함은 완전히 걷혔다.


  마지막 날 밤, 우린 내 숙소의 창가 아래서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안주는 노랗게 잘 익은 옐로우 멜론. 유난히 긴 유럽의 해가 그날따라 빨리 저무는 기분이었다. 창 밖에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고, 완전히 깜깜해진 밤하늘엔 쌀알 같은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적당히 취한 우린 각자의 방식으로 널브러진 채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스트라스부르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없었을 순간이다. 어느새 다시 친구가 된 현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엄청 그립겠지?”


 

ps. 그로부터 6년 뒤, 제주에서 만난 현은 프랑스 음식점을 운영 중이었다. 내게 해준 제육볶음이 괜히 맛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우리의 술과 대화는 제주에서도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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