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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Dec 21. 2020

열 시간을 달려 스트라스부르로

망해도 괜찮으니 후회만 없도록

 현이 사는 스트라스부르를 일정에 넣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다. 3년을 그녀와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라곤 세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빈약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트라스부르에 가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다. 현은 유럽에 거주하는 유일한 나의 지인이었으니까.


 떠나기 한 달 전, 4년 만에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현에게 연락했다. 잘 지내? 답장은 오지 않았다.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 현과 내가 공유하는 추억이라곤 입학 전에 동기들과 함께 의정부 닭갈비집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렸다는 이유로 ‘의정부 팸’으로 찍혀 선배들에게 불려 다녔던 웃지 못 할 에피소드 뿐이었으니. (싸이월드에 올린 사진이 너무 일진 같았단다.) 현과 나는 그 의정부 팸의 창립멤버였다. 제 뜻과 상관없이 의정부 팸이 되어버린 우린 학기 초에만 반짝 친목을 과시하다 서로 다른 각자의 소속으로 자연스레 흩어졌다. 이후에는 생일이나 명절에 마저 그 흔한 안부 문자 하나 주고받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 갑작스런 나의 연락이 달갑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 현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 응, 수훈아. 오랜만이다. 무슨 일이야?

 나는 거두절미하고 연락을 건 목적부터 이야기했다.

- 나 다음 달에 프랑스 가. 만날 수 있으면 만나자!

 내심 현이 얘가 유학생에게 빌붙어 경비를 아껴 볼 속셈인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을까 걱정 됐지만 금방 깔끔 명료한 답장이 도착했다.

- 그래, 좋아. 스트라스부르로 와!


 암스테르담에서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는 버스는 장장 10시간이 넘었다. 엉덩이가 차라리 탈부착이면 좋겠다 싶은 신개념 고통을 선사하며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4시간 간격으로 들린 휴게소엔 어째서인지 화장실이 없었다. 때문에 승객들은 내리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드넓은 초원 속으로 뛰어들어 대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세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기 전까진 참을만 했던 나 또한 결국은 대자연과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해 거름을 뿌리며 생각했다. 누구 탓을 하겠니. 그 비싼 스트라스부르행 열차 티켓을 우주상에도 없는 주소로 부쳐버린 건 다름 아닌 내 손가락이었는데.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한 건 열 한시가 넘은 깜깜한 밤 이었다.

 통신비가 아까워 와이파이 존에 붙어 연명했던 나의 폰은 배터리마저 수명을 다했다. 로밍이란 최후의 가능성도 사라졌으니 현과 연락 할 방법은 제로. 혹시 엇갈렸으면 어떡하지. 스트라스부르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질수록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이윽고 도착한 버스는 출입문을 열었다. 그 뒤로 후광이 빛나는 한 여인이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현 이었다.

 허겁지겁 짐을 챙겨 내리자마자 와락 현을 껴안았다. 별다른 용기 없이도 어색함을 뚫어버리는 십여 시간의 드라이브였다. 더불어 이토록 먼 타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가 어찌나 큰 위안이 되던지. 예상치 못한 나의 포옹에 다소 당황한 현의 눈동자는 길을 잃은 듯 보였다.

 “오느라 고생했네.”

 현 특유의 속을 모르겠는 미소와 나른한 말투. 변함이 없구나. 그제야 우리 사이의 시간은 고등학생 때에 멈춰있구나 싶었다.


 현은 본인이 잡아뒀다는 기숙사로 나를 안내했다. 방학 땐 방이 비어 여행객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이 기숙사는 현이 아니면 알 수 없던 꿀팁이었다. 기숙사 앞에 도착해 현은 경비 아저씨와 몇 마디 불어를 주고받더니 키를 받아냈다. 나도 괜히 인사 한마디를 얹었다.

 “merci(감사합니다).”

 아저씨에겐 미소를, 현에겐 발음이 좋다며 칭찬을 받았다. 할 줄 아는 말이 메르씨 밖에 없는 건 함정이지만.


 두 세 계단을 올라 받아온 키로 방문을 열었다. 네모난 창 아래 커다란 책상과 일인용 침대, 그리고 플라스틱 옷걸이 몇 개가 걸려있는 좁은 옷장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고개를 돌려 엄지를 치켜세우며 현에게 말했다. 메르씨! 푸핫. 어이없다는 듯 웃는 현이었다.

 “아, 맞다. 이 옆방에 만창과 선배도 지내고 있어.”

 바로 옆방은 고등학교 만화창작과 선배가 쓰는 방이었다. 사실 일면식도 거의 없는 사이였지만 같은 학교 선배라는 사실만으로 괜히 반가웠다.


 현이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아껴뒀던 나가사키 짬뽕 두 봉지를 들고 옆 방문을 두드렸다.

“선배, 라면 드실래요?”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만한 행동이었다. 나 홀로 여행은 티끌만한 학연, 지연조차도 매우 감사한 존재였나 보다.

 선배도 나가사키 짬뽕이 내심 반가웠는지 재빠르게 전기레인지와 냄비를 가져왔다. 낯선 사람에 낯선 상황이었지만 눈앞에 끓고 있는 라면을 보고 있자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이윽고 라면이 완성됐고, 우리는 입천장이 데여가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다. 적막한 방 안은 후루룩 후루룩 소리로 가득 찼다.

 깨끗하게 비운 선배의 냄비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던 선배도 꽤 외로웠구나. 어쩌면 이 라면이 선배에겐 니콜라의 까르보나라였을 수도 있었겠다.


 식사 후 설거지 한 냄비와 전기레인지는 선배 방에 돌려주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크고 네모난 창을 바라봤다. 까만 창밖엔 가위로 오려낸 것 같은 손톱달이 걸려있었다.

 하루의 삼분의 이를 무려 버스 안에서 보낸 날이었다. 무사히 이곳에 두 발을 붙이고 있단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을 믿지 않는 나지만 이 여행에서만큼은 없던 신도 믿고 싶어진다.

 달을 보며 빌었다. 망해도 괜찮아요. 후회만 없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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