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un Dec 14. 2020

왜 싫다고 말을 못해

예스맨의 부끄러운 기억

 

 지나고 나면 이불을 걷어차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다. 파리 다음의 여행지, 암스테르담의 기억이 그러하다.  그곳엔 어김없이 거절을 못하는 예스맨이었던, 몹쓸 용기를 장착한 내가 있었다.

 호스트의 제안에 그를 따라 홍등가를 구경했고('구경만' 했다.), 그가 건넨 예거 마예스터를 열 샷 넘게 받아 마셨으며, 거리 한복판에서 강남스타일을 열창하며 말춤을 췄다.(지금도 충분히 후회한다.) 그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다. 귀가하는 버스에서 동서남북으로 격렬하게 헤드뱅잉을 하다 정신을 잃었고, 눈 떠보니 차가운 화장실 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강력한 파워로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면서 말이다. 온 몸이 젖어있었지만 옷을 벗을 힘조차 없었다. 결국 그 상태로 날이 밝았다. 날이 밝음과 동시에 생각했다.

 ‘어지간해선 끌어내서라도 방 안에서 재웠을 텐데…. 나 정말 어지간했나 보다.’

 암스테르담 카우치 서핑 호스트, 추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을 추... 뭐라 소개한 그였지만 이름이 너무 어려운 관계로 편의상 추라고 하겠다. 추와 나는 술에 취해 겨우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내가 ‘토 나올 것 같다’고 하자 추가 나를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그때부터 신나게 토를 쏟았다. 먹은 거라곤 물과 술이 전부. 입에서 쏟아지는 건 투명한 액체 뿐이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고자 샤워기를 머리에 갖다 댔다. 엄청 차가운 물이 머리통을 깰 듯 두드려 팼다. 나는 거기서 그만 전원이 꺼져버렸다.


 내가 집 주인이었어도 보통 꼴사나운 일이 아니다. 깨자마자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방 문 틈 사이를 들여다봤다. 자고 있는 추가 보였다. 사과를 하거나 하다못해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술이 완전히 깬 상태여야 할 것 같아 나도 좀 더 잤다.

 서너 시간 잤나. 공사를 하는지 창밖에서 ‘으드득, 으드드득’하는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 오만상을 쓰며 잠에서 깼다. 소음의 원인은 다름 아닌 이를 가는 소리였다. 그것도 나의. 내 방구 소리에 깜짝 놀랐던 적은 있었지만 내 이를 가는 소리에 놀라기는 또 처음이다. 잠버릇이 이렇게까지 고약한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지난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를 가는 소리는 술이 깨고도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 없던 버릇이었다. 정말이지 숨 쉬듯이 신경질적으로 이를 갈았다. 멈추지 않는 이 가는 소리에 머릿속에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이러다 이가 다 갈려버릴 것 같아 억지로 입을 쩍 벌렸더니 이번엔 턱이 빠졌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반쯤 벌어진 턱 빠진 얼굴을 하고 거실로 나왔다. 처음 집에 왔을 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먹다 남은 과자 봉지, 개수가 가늠이 되지 않는 담배꽁초 더미, 음료 페트병 같은 쓰레기들. 솜뭉치 같은 까만 먼지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퐁퐁 흩날렸다. 끔찍하게 더러운 집이었다. 화장실에서 잔 게 다행일 정도로.

 의자 위엔 집과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방석이 숨을 고르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얼씨구, 고양이였다. 고양이가 있는 집인지도 몰랐다.


 추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포스트잇에 미안하다고 적어 컵라면에 붙인 뒤 책상 위에 두고 나왔다. 한국인들이 해장용으로 먹는 스파이시 누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시내 관광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컵라면과 포스트잇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무래도 추는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말없이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는 추의 등에 대고 개미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는 미안해. 나도 그렇게까지 취할지 몰랐어. 추는 대답했다. 괜찮아. 술 마시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어제와 확연히 다른 추의 태도에 주눅이 들었다. 어쩌면 나로 인해 한국인 전체에 대한 인상이 나빠졌을 수도 있어. 축 늘어진 채 방 안에 들어와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파리에 좀 더 있을 걸... 니콜라가 디즈니랜드 할인 쿠폰 있다고 했는데...

 일기를 쓰며 한창 감상에 젖어있던 중, 갑자기 바깥에서 나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실로 나가보니 장대 같은 몸집으로 호들갑 댄스를 추고 있는 추가 보였다.

 “쥐.... 쥐 좀 잡아줘....!”

 가지가지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구나. 더러운 집이란 건 진작 알았다만 세상에, 집에서 쥐가 나오다니.

 그러나 이건 추의 마음을 뒤집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기회다. 내 손으로 멋지게 쥐를 처치한다면 추의 상한 기분을 조금은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망친 한국인의 이미지도 회복할지 모르는 일이다...는 무슨, 나도 쥐 졸라 무서워.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쥐라고. 가늘고 긴 그 회색 꼬리를 보는 순간 온 몸의 털이 쭈뼛 선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린단 말이다.


 쥐는 추가 키우는 흰 고양이에게 밟힌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고양이는 절대 쥐를 죽이지 않는다. 끝까지 갖고 놀 뿐이다. <톰과 제리>의 제리가 죽지 않는 이유다. 고로 저 쥐새끼는 죽은 척 하는 것일 뿐 아직 죽지 않았다.

 추는 여전히 뒤에서 호들갑 댄스를 추며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눈을 질끈 감고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장난감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고양이가 내 손을 발톱으로 할퀴었다. 집게손가락의 벌어진 살갗 사이로 붉은 피가 봉긋 솟았다. 추는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고 쥐를 치워 달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 죽여 버리고 싶다. 손가락 끝으로 쥐의 꼬리를 잡아 든 채 추를 향해 ‘이제 어떻게 할까’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끝엔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대롱거리는 쥐새끼가 있었고 추는 손가락으로 싱크대 옆의 베란다 창을 가리켰다.

 주저 없이 있는 힘껏 베란다 창밖으로 쥐를 던져버렸다. 가엾은 쥐새끼는 창밖의 수풀 속으로 맥도 추리지 못한 채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자 해맑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는 추가 있었다.

 그로써 깨달았다. 거지같은 하루를 선물한 건 예스맨이 아닌 추의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부터였다는 것을. 쥐를 잡아달라는 요구에도 예스를 마다하지 않았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것으로 빚은 청산이다. 그리고 추를 향해 어김없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얘기했다.

 “나 내일 아침에 떠날게.”

 1박을 더 있겠단 예정과 달리 내린 결정. 여행을 떠난 후로 예스맨의 입 밖에 처음 뱉은 "NO" 였다.



Shun's instagram

contact : shun-yoon@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니콜라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