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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Nov 09. 2020

니콜라에게

파리를 떠나며

 니콜라에게.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하네요. 출근은 잘 하셨어요? 저는 생각보다 지하철역에 일찍 도착했나 봐요.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이 저밖에 없네요. 배가 고파서 마트에서 뭐라도 사 오고 싶었는데 너무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연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니콜라가 길을 잘 알려주긴 했나 봐요. 길 잃고 헤매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일찍 나온 거였는데,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여유가 생겨버렸네요.


 어젯밤엔 제가 집에 너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아요. 파리에서 마야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 친구랑 밤새 돌아다녔거든요. 에펠탑 앞 풀밭에 앉아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시내 곳곳을 누볐어요. 제 꿈이 배우라고 하니까 마야가 술 때문에 빨개진 얼굴로 “넌 나처럼 얼굴이 안 빨개지니까 배우로써 합격”이라고 하대요. 시답잖은 농담에도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거리의 가로등도, 문 닫은 상점들도 괜히 예뻐보였어요. 센느 강은 밤에 특히 아름답더라고요. 뭐 하나라도 마음에 더 담아가고 싶었어요. 아니, 파리가 먼저 하나라도 더 보고 가라고, 하나라도 더 담아가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파리를 떠나야 한다니 정말 속상해요. 사실 처음엔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게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파리가 좋아요. 파리가 너무너무 좋아졌어요.


 어떻게 하면 낯선 이방인에게 내 도시를 반하게 할 수 있을까도 고민해봤어요.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되지 않았는데 그 중심엔 니콜라가 있더라고요. 니콜라가 툭툭 던져놓은 배려 속에서 저는 맘 편히 파리를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았거든요. 고마워요.

 오늘 새벽 저를 버스역 까지 데려다주면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알려주던 모습엔 눈물까지 날 뻔했어요. 버스에서 내리면서 기사 아저씨에게 저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도 하고 갔죠? 다 봤어요. 물론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요. 그래도 그런 거 있잖아요. 알아 듣지 못해도 알 수 있는 것들.

 니콜라의 배려가 그랬어요. 돌아보니 보이는 툭, 툭 던져 놓은 배려들. 니콜라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저는 안심하고 파리를 즐길 수 있었어요.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것을 했어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이제 와서 하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처음에는 의심을 하기도 했어요. 목적이 있을 거라고요. 낯선 사람을 내 공간에 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하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으면 쉬워진다고 생각했어요.

 첫날 니콜라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한국 식품들이 많이 보여서 그런 오해에선 빠르게 벗어났어요. 니콜라는 한국에 관심이 많아 나를 초대해줬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마저도 며칠뿐이었어요. 한국에 대한 문화나 정보에 대해서도 니콜라는 더 이상 묻지 않았거든요. 그저 오늘 뭐했는지, 어떤 걸 먹고 싶은지, 내일은 뭘 할 건지 등 일상적인 대화들을 나눴어요. 그때 느꼈죠.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란 얼마나 좁은 곳이었는지요.

 내가 건설한 나의 세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참 쉽고 간편해요. 경험에 의한, 혹은 학습에 의한 조건에 들어맞기만 하면 그런 사람으로 정의 내릴 수 있으니까요. 그간 얼마나 편하게 세상을 바라봤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 사람은 혼자 사는 남자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카우치 서핑을 할 거야, 이 사람은 서양인이니까 동양인인 나를 이렇게 생각할 거야, 이 사람은 집주인이니까 손님인 나를 이렇게 생각할 거야.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오로지 ‘나’에 의한 기준 속에 ‘이 사람은 그럴 거야’를 끼워 맞춰왔던 것 같아요. 니콜라가 그런 생각을 바꿔줬어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요.

 니콜라가 만들어줬던 음식들을 잊지 못해요. 까르보나라, 푸아그라, 에스까르고, 르 프로그, 라클레타... 다음에 한국에 놀러 오게 된다면 떡볶이로 보답할게요. 제가 제일 자신 있는 메뉴거든요. 기대해도 좋아요.

 

 방금 열차에 막 탔어요. 암스테르담까지는 두 시간이 조금 안 걸리네요. 이렇게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니 새삼 신기하고 재밌어요. 해저 터널을 건넜던 파리 행 유로스타는 창밖에 온통 어둠뿐이었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프랑스 교외의 모습이 보여요. 해도 막 뜨기 시작했어요.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이네요. 풀을 뜯고 있는 말들도, 해를 등진 작고 낮은 건물들도요. 빠르네요. 찰나의 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요. 파리에서 지냈던 지난 8일처럼요.


 암스테르담에서 니콜라만큼 좋은 호스트를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경험상 제 뜻대로 되는 일은 적어도 이 여행 안에선 없었거든요. 조금 해탈한 것 같죠? 해탈했는지도 몰라요.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면 그 상실감이 배로 커진다는  걸 첫 비행기를 놓침으로써 배웠거든요.

 그럼에도 마주하게 될 처음의 질감, 설렘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긴 해요. 그러니 걱정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요. 어차피 하게 될 걱정이란 것을 아니까 적어도 그 걱정을 당연하게만 여기면 좀 낫지 않으려나, 식의 태도인 거죠.

 그렇게 여행을 해 나갈게요. 닥쳐올 미래에 대한 걱정을 부정하기보단, 당연하게 걱정을 향해 나아갈게요. 니콜라가 준 용기예요.

 암스테르담에선 이틀 밤만 자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요. 기회가 닿는다면 또 만나요. 친구가 되어주어 고마워요, 니콜라.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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