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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Feb 22. 2021

이제야 깨닫는 여행하는 법

여행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의미를 갖는다

 안시로 가는 열차 안. 땀은 식었고, 거친 숨은 돌아왔다. 나는 다시 노란 일기장을 펼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행하는 법>


언제 가게 될지 모를 다음 여행과, 나의 이후 행보를 위해 적어둔다.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며 내가 터득한 여행 팁이다.


(1) 캐리어 금지.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있는데, 여행자의 짐은 곧 인생의 무게와 같다고 했다. 이 캐리어, 정말이지 지금 내 인생의 무게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나 같은 장기 여행자의 경우엔 이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아까 같이 위급한 상황에선 강물로 던져버리고 싶은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2) 최소한의 짐만 챙기기. 위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한'은 정말 이 여행에서 꼭 필요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권만 있어도 된다. 너무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그만큼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해서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있다.


(3)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최선의 상황은 내가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잘 곳이 없으면 마을 주민들 집에 문을 두드려봐도 좋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는다면 길바닥에서 자면 된다. 물론 이런 상황까지 가정하고 떠난 여행이라면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준비들을 더 해야겠지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래야 그 에너지 주위로 사람이 몰릴 테니.


(4) 시도하자. 안 되는 건 없다. 시도를 안 해봤을 뿐이다. 일단 해보고 안되면 다른 시도를 해보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은 수없이 많다.


(5) 내가 가진 자원을 활용하자. 제이 누나가 내게 해 준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원이라 하면, 물질적인 것이 아닌 내가 가진 재능이나 능력을 말한다. 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사지 멀쩡한 건장한 대한민국의 성인 남자로 설거지든 잡초 뽑기든 시키는 건 뭐든 다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여행에서 활용할 수 있는 나의 자원이다. 돈이 없으면 이 자원들로 재화를 대신하면 된다.


(6) 절대 준비하지 말자. 인생은 예측불허, 생은 그리하여 의미를 갖는다.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명대사다. 준비를 해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 하는데, 하물며 여행이라고 다르겠는가. 이곳에 와서 가장 후회하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너무 많이 준비하고 왔다'는 것이다. 내가 준비했어야 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다 된다'는 마음.

 기차표며 비행기표며 너무 많이 예약해놓고 오는 바람에 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파리의 니콜라 집에서도 더 머물고 싶었고, 암스테르담에선 예정된 이틀보다 하루 먼저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교통편을 이미 전부 예약해뒀었기에.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여행에 완벽이란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또한 계획에 없었던 우연의 순간들이다. 이쯤 되면 여행이란 우연의 합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예측할 수 없었던 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의미가 되어 가슴속에 박혔다. 역시 여행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의미를 갖는가 보다.


 간이 테이블에 코를 박고 열심히 글을 쓰다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니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코발트 블루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푸른 하늘에, 끝이 보이지 않는 녹색 초원. 그 사이에 꽃처럼 피어난 빨갛고 노란 지붕들과 열심히 풀을 뜯는 젖소들. CF속의 그림 같은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여행에서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이렇게나 갑자기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나 보다. 예측불허 투성이인 이 여행을 말이다.

 내 맞은편에는 안경을 쓴 한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수줍게 웃었다. 용기를 내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언어 때문에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새삼 반가워하며 어떻게든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따뜻한 온기가 오고 갔다. 이 우연한 만남에 새로운 의미를 두기 위해 아주머니께 한국에서 사 온 북마크를 선물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를 기억해달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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