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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r 02. 2021

나의 프랑스 아빠 엄마

하나만 보고 열을 판단해버리고 싶어진 미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습관 따위가 무의식 중에 드러날 때 진짜 본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한 가지 면만으로 상대방을 정의내릴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편식을 하는 사람은 무조건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일 거다 라고 결론 짓는 것 같이 말이다.

 그러나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말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생긴다. 그것은 생존 본능과도 곧 연결 되는데, 작고 사소한 순간에도 위험함이 감지되면 상대방을 곧 잠재적 범죄자로 파악해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런던에서 만났던 변태 아저씨가 부탁하지도 않은 내 속옷까지 빨래 해놨을 때, 나는 뭔가 이상함을 직감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호의를 마냥 무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범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재적인 무언가로 그를 정의내렸던 것이다.

 나는 결코 이런 직감에 있어서 둔감한 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평균보다 더 예민한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기척없이 찾아온 이러한 직감을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다. 하나만 보고 평가해선 안된다며 스스로를 재차 세뇌시킨다. 더군다나 빚을 져가며(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여행하고 있는 자발적 ‘을’이 되어버린 이 여행 안에선 그런 나의 기질이 더 작동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결론짓고 싶은 때도 있다. 나의 프랑스 아빠, 엄마. 파스칼과 나탈리 부부를 만났을 때 처럼 말이다.



 안시역에 도착했을 땐 화창한 날씨나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역에만 오면 긴장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교통 수단과 관련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잔뜩 긴장한 채 두리번 거리며 오늘 아침 기적적으로 구해진 안시의 카우치서핑 호스트와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호스트의 이름은 나탈리. 레퍼런스는 하나 뿐이었지만 긍정적인 내용이었고, 화목해 보이는 중년 부부의 사진이 프로필로 걸려있었기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어도 될 것 같았다.

 역으로 마중 나와준 나탈리 아주머니 덕에 편하게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이날 나는 세 번 정도는 적잖이 놀랐던 것 같은데, 가장 첫 번째는 집 때문이었다. 심즈라는 게임에서나 볼 법한 넓고 쾌적한 집의 컨디션에 입이 떡 벌어졌다. 잉어들을 풀어놓은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은 물론이고 화장실만 네 개가 있는 집이었다. 더군다나 나탈리 부부는 나 혼자 쓰라며 방 하나를 통째로 내어주기도 했다. 커다란 창 밖엔 보기만해도 싱그러운 정원의 녹음이 꽉 채워져있었다. 두 번째는 이들이 카우치 서핑을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탈리의 남편인 파스칼 아저씨에게 물었다.

 "어쩌다 카우치 서핑을 하게 됐어요?"

 알고 보니 둘은 젊어서부터 시간만 나면 여행을 다니던 여행자 커플이었고, 이젠 여행을 다닐 여력이 되지 않아 무료해 하던 중 딸에게 카우치 서핑을 소개 받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내가 겨우 두 번째 손님이라고 했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카우치 서핑 프로필에 딱 하나 올라와 있던 긍정적인 레퍼런스가 떠올랐다. 얘기를 듣고보니 집 안 곳곳에 걸려있는 액자 속 사진들이 달리 보였다. 액자 속엔 배낭만 메고 이곳 저곳 여행을 다니던 젊은 시절의 파스칼, 나탈리 부부의 모습과 여행 다닌 지역을 핀으로 표시해놓은 세계지도가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가족의 친화력 때문이었다. 이 가족이 특이한 건지, 혹은 나라 간의 문화 차이인 건진 잘 모르겠지만, 그간 내가 겪어온 것과는 다른 방식의 친화력에 낯선 기분을 느꼈다. 이날은 마침 나탈리 가족들간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탈리 부부의 딸 솔레나를 비롯한 몇몇 친인척이 집 안에 모였다. 그 자리에 엉겁결에 나도 참석하게 되어버렸다. (정신 차려보니 그들 사이에 내가 앉아있더라.) 그들 가족과 함께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와인을 나눠 마셨다. 나를 소개하며 여러가지 얘기를 주고 받다 나중엔 약간 취기가 올라 노래를 불러버리기도 했다. (반응 좋았다.) 나탈리 부부의 딸인 솔레나는 이런 내가 신기하고 재밌었는지 친구들과 가기로 한 영화제에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때마침 '애니메이션계의 칸느 영화제'라 할 수 있는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열리는 기간이었다. 멋진 우연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솔레나의 남자 친구를 비롯한 친구들에 둘러싸여 안시의 커다란 호수 앞 잔디밭에 앉아있었다. 호수를 배경으로 크게 띄운 스크린엔 처음 보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있었다. 사정 없이 쏟아지는 불어 더빙에 정신이 혼미해져 잠깐 졸기도, 차가운 호수 밤 바람에 덜덜 떨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선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참 신기하다. 내 누나나 이모, 고모부, 친척들이 모인 가족 모임에 처음 보는 낯선 외국인을 데리고 와 같이 식사 한 것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근데 갑자기 그 외국인이 좀 취해서 갑자기 노래까지 한다.) 식사 후엔 내 친구들과의 약속에 이 외국인을 데리고 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원래 알던 사람인 것 마냥 너무나 편하게 대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이상하고 또 신기했다.

 이러나 저러나, 나의 놀람 포인트는 모두 긍정적인 쪽이었고 속으로 예쓰를 외치며 생각했다. 이거... 로또구나.


 이 모든 시작은 나탈리, 파스칼 부부의 첫 인상에서부터 였다. 순수함을 사람의 표정으로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던 맑고 투명한 그들의 미소. 그들과 처음 인사를 하며 건네받은 그 미소를 통해 이번 한 번쯤은 하나만 보고 열을 판단해버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확신은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아니,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 없는 형태로 내 가슴속에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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