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그리고 Simple

심리 불안을 객관화하기

by 도연아빠

1999년은 IMF로 인한 구조조정의 여파로 사회의 아픔이 지속되던 해였다.

난 그 해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내가 입학한 해부터 학교는 학부제를 시행했다.

1학년 의 성적을 중심으로 재학생의 선호도에 따라 학과가 확정되는 제도였다.

(이때부터 학점이 선동열 방어율이네 하는 낭만적 표현들은 사라졌다.)

그런데 나는 학부제와 무관한 단일학과였다.

덕분에 선배들과 많이 놀았고 술자리도 잦았다.

다만, 선배들에 의한 뜬금없는 얼차려가 많았고 이 너무 싫었다.

결국 왕따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발적 왕따가 되기 전, 학년 별 상견례에서 선배들에게 들었던 말들

중에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 소개한다.

2학년: ‘작년은 맥주 마셨지만 올해부터는 막걸리로 하자.’

3학년: ‘1학년이 벌써부터 도서관에서 자리 잡고 공부하고 있다니까!’

4학년: ‘토익이라는 게 있어. 대기업 취직하려면 꼭 880점 이상해야 돼.’

선배들의 말을 요약하면 정을 소중히 하는 대학문화에서

취업을 우선 시 하는 문화로의 변화라고 할 것이다.

99년부터 시작된 취업 중심의 대학문화는 지금 주류가 된 것 같다.

취미로 모여 우정을 나누던 동아리들 대다수가 사라진 것이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새로운 취업의 조건이 나타났다.

바로 어학연수다.

대기업에 면접을 보려면 최소 6개월에서 2년 사이의 어학연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공무원, 공기업 등을 지망하는 동기들 외에는 대부분 필리핀 또는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비용은 500만 원에서 최대 2천만 원까지 든다고 이야기 들었다.

당시 아버지의 월급은 IMF 이전이나 이후에도 160만 원...

공무원을 직업으로 결정했다.


내가 공무원을 선택한 계기는 2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IMF였다.

1998년인 고 3 시절, 학교에 급식비를 제때 납부하는 친구들 대부분은 부모가 공무원이었다.

그때는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그다음으로 공무원 시험 중에서 어떤 것을 준비할까 생각하다 고 2 시절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꿈을 크게 가져. 서울대 가려는 놈은 연고대는 가고,

연고대 가려는 놈은 지방 국립대는 그냥 가니까!’

나는 바로 결심했다.

‘좋아, 행정고시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행정고시하다 보면 7급 정도는 그냥 되겠지 생각했다.


두 번째 계기는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혜택 때문이었다.

그 혜택은 기숙사 무료 이용 및 기본서 강의 무료 수강이었다.

그런데 고비 한 가지가 있었다.

행정고시반 입실을 위한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것!

나는 급히 기출문제를 풀어봤으나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시험을 보고 나와서 탈락했다고 생각했었다.

전혀 기초가 없었고 영어가 어려웠다.

시험일로부터 1주일 후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행정고시반 입실이 확정되었으니 보건소에서 신체검사를 받아오라는 내용이었다.

기쁨보다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혹시 다른 사람에게 갈 문자가 잘못 온건 아닌가 싶었다.

재차 학교 측에 확인해보니 내가 맞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해 신림동 고시촌으로 떠나는 학생들이 많았단다.

그 여파로 입실 공간이 많이 남아서 합격통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나는 2000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집에서 짐을 챙겨 행정고시반 숙소로 이사를 했다.

숙소는 2인 1실 이였다.

내 룸메이트는 98학번으로 2차 시험을 치르고 내려온 선배였다.

(그 해 2차 시험은 불합격되었지만 몇 해 뒤 합격해서 현재 4급으로 재직 중이다.)

이 선배를 만나면서 행정고시 합격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배는 아버지가 LG계열사 임원으로 가정 형편도 좋았다.

난 선배에게 금전적으로도 신세를 지게 되었다.

주말에는 선배가 영화도 보여주고 밥도 사주고 했었다.

물론 청소나 빨래는 내가 전담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기숙사 생활을 하던 중 선배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성순아, 넌 하루에 도서관에서 몇 시간 정도 공부하니?’

‘대충 10시에 자리에 앉아서 밤 9시 30분까지 도서관에 있어요.

점심식사 1시간 하고 잡담하는 2시간 빼면 9시간 정도요. ’

선배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단순히 앉아있는 시간은 의미 없어. 너 도서관에서 잠든 모습을 자주 봤어.

하루에 6시간 정도 집중하지 못하면 합격은 어려워.’

난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행정고시 2차 시험은 신림동에서 준비해야 돼.

그때부터는 돈도 많이 들거야.

형은 네가 이 길로 계속 갈 것인지 깊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내가 어머니와 통화하며 나눈 말들을 형이 듣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일로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선배도 알게 된 것 이였다.


‘선배는 몇 달 후에 신림동으로 갈 거야. 군대 가기 전에 꼭 합격하려고.

네가 계속 공부하겠다면 같이 갔으면 좋겠어.’

예전에 선배와 함께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선배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봤던 신림동 고시원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만일 선배와 함께 신림동에 간다면 원룸을 구해서 살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머니와 이야기해서 빠른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다.


선배와 서울 신림동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2가지 걱정이 되었다.

첫 째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 자신, 두 번째는 돈이었다.

내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주요 원인은 어머니와의 전화통화였다.

어머니는 집안의 문제들을 나에게만 이야기하셨다.

그 문제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누나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었다.

어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면 머리 속에 어렵고 복잡한 온갖 문제들로만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일 들이 일주일에 4일 이상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음악에 의지하였고 음악을 듣다가 도서관에서 잠들게 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두 번째 돈 문제는 위에 이야기한 아버지 월급으로 짐작이 되리라 생각한다.


가정 형편 상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이 무리인걸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신림동에서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해볼 테니 서울에서 공부하라고 하셨다.

난 선배와 함께 서울로 가게 되었고 매월 50만 원을 생활비로 받았다.

원룸의 보증금은 형이 내고 월세의 절반인 20만 원을 지불했다.

남은 30만 원으로 신림동 생활을 해야 했다.

월 20만 원 가까이 되는 정기 식권 대신 개별 식권을 구매하여 점심 1끼만 먹었다.

(아침에는 빵 3개 묶음 1000원 짜리를 사서 먹었다.)

선배가 독서실로 공부하러 가면 원룸에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층간 소음과 졸음으로 나도 독서실을 알아봐야 했다.

때 마침 관악산 초입의 독서실에서 땜빵 총무를 구하고 있었다.

급여 대신 독서실 자리를 주는 알바였다.

학원비와 교재는 어머니의 신용카드로 지불했었다.

이렇게 서울 생활이 정리되면서 이 시간들이 낭비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2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5개월 만에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첫 번째는 누나 중 한 명이 내 이름으로 휴대폰을 개통하고 요금을 미납해서

내가 약 2백만 원의 부채를 지게 된 것이었다.

또 어머니의 신용카드를 훔쳐 4백만 원을 사용한 것이었다.

나와 어머니가 경찰에 명의도용으로 누나를 신고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그렇게 되면 자식을 범죄자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나로부터 연락을 기다렸지만 1달이 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제2금융권에서 7백만 원을 대출받았다.

그리고 내게 해결되었으니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하셨다.

그 후로 2주 만에 고향에 갔었다.

어머니가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난 고향에 남기로 결심했다.

얼굴이 치과치료를 받지 못해 부어있었고 그 몸으로 미화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어머니의 손가락에 있던 외할머니가 주신 반지도 보이지 않았다.

난 서울에서도 집안 문제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 버린 시간들이 많았다.

내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그 시간들이 전부 어머니의 고통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와서 선배에게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 번에는 집안 사정도 자세히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선배는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알겠다는 말을 했다.

다음 날 어머니에게도 이 번달까지만 서울에 있겠다는 말을 전했다.

다행히도 선배는 다른 룸메이트를 구하게 되었다.

나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고향에 내려올 수 있었다.


고향에 내려오고 두 달 후 형에게서 책과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다.

형이 써준 편지를 읽고 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성순아, 넌 서울에서 열심히 했어. 그러니 후회할 필요 없어.

다만, 넌 착해서 문제야. 네가 지금 어머니 걱정을 한다고 바뀌는 현실은 없잖아.

차라리 집안 문제는 잊어버리고 가장 빨리 취업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넌 할아버지가 집안 문제의 근원이라고 했지?

형도 할머니가 비슷한 분이셔. 그래서 부모님이 많이 고생하셨지.

널 보면 내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더구나.

가끔 형 하고 맞먹으려고 해서 마음에 안 들지만 내가 이뻐하는 후배,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던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당시 나는 선배가 나를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선배도 2차 시험을 앞둔 민감한 시기였고 그 해 시험에 불합격했기 때문이다.

난 불합격의 원인이 나 일것 같다는 생각에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편지를 읽고 난 후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그리고 형이 보내준 자그마한 책을 집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제목의 책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계기로 어느 정도 심리 불안을 이겨냈다.

수험을 앞두고 심리 불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최근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들의 학업 수준에 큰 영향을 준다는 언론보도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보도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의 자녀는 가난과 학업 수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만, 가족 구성원 간의 불화로 가난해진 가정의 자녀에게는 맞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자녀들은 불안하고 스트레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 불안으로 공부보다는 자극적인 외부 충격을 추구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바로 나의 누나들처럼 말이다.


공부는 잘하고 싶은데 가정불화로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다.

우선 Simple한 마음과 생활습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휴대전화를 없애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를 우울함에 빠지게 하는 잘 나가는 친구들의 근황이나

갑자기 접하게 되는 집안의 좋지 않은 소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험공부에 집중하고 싶은가?

단순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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