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품 불매와 나

일제강점기가 우리 가족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by 도연아빠

나의 할아버지는 1923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1930년대 징용과 징병을 당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징용, 징병을 당하게 되었을까?

그 사연은 할아버지가 4형제 중 셋째라는 것에 있다.

장남은 집안의 기둥이라

둘 째는 몸이 약해서

막내는 어려서 할아버지가 대표로 탄광에 징용을 가야 했다.

할아버지 말을 빌리면 이렇다.

"우리 동네 면 서기가 집 마당에 누워서 아들 4명 중에 1명은 꼭 보내야 한다고

그렇게 못하면 나도 죽게 생겼으니 이 자리에서 죽겠다고 누워버리지 뭐여.

그래서 내가 간다고 했어. 그 면 서기가 먼 친척이기도 했고 말여..."

그럼 징병은 어떻게 가게 되었나?

할아버지는 탄광에서 조선인 청년 4명과 탈출을 시도했다.

뜻이 맞는 4명의 조선인 청년들과 함께 말이다.

탈출 이유는 탄광도 전쟁터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셨다.


그런데 탈출 도중에 큰 사고가 있었다.

꽤 높은 언덕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다 한 청년이 장파열 사고를 당했다.

그 사람의 복부에서 오장육부가 흘러나왔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와 동료들은 그를 버리고 빨리 도망가려 했다.

잡히면 삶을 마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청년의 한 마디에 그의 배를 옷으로 동여맨 후 다시 뛰었다.

'니들도 내랑 같이 가자. 다 일러바칠 거야...'

할아버지와 동료들은 항구 근처에 조선인이 운영하는 주막까지 도망 나왔다고 한다.

이 무렵에 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얼굴색이 파랗게 변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란 말 외에는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고 한다.

결국 주막에 그를 남겨두고 할아버지와 동료들은 배를 타고 조선으로 탈출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를 맞이한 것은 부모의 따뜻한 포옹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이미 탈출 소식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일본 순사가 할아버지의 도망 소식을 알리고 큰 형을 징병자로 끌고 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증조할머니께 이런 말을 들었단다.

'그곳에서 죽어버리지 왜 돌아와서 이런 일을 또 당하게 하냐. 이 놈아...'

할아버지는 큰 형을 대신해 다시 징병을 가야 했다.

징병장에서는 아침마다 정신개조라는 이름 하에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때로는 이 과정에서 군홧발에 머리를 차여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약 1달 집에서 훈련장까지 왕복하며 군사훈련을 받고

동남아 중 버마로 파병을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태운 배는 부산을 떠나 시모노세키항에서 정박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일주일이 지나도 배는 버마로 출발하지 않았다.

당시 할아버지는 일본 놈들이 이 배를 폭파해서 조선 청년들을 몰살시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일본 장교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단다.

"전쟁은 끝났다. 이 배에서 내려 돌아가도 좋다."

할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멍했다고 한다.

그리곤 어떻게 배를 빌려서 보은까지 가지라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말하셨다.

할아버지는 부산으로 가는 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사할린까지 종주를 하고 만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만주에서 북한을 거쳐 고향인 충북 보은에 도착했다고 했다.

시모노세키에서 충북 보은까지의 여행은 반년 정도 걸렸다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가장 큰 문제는 해방 후 할아버지의 귀환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바로 할아버지의 생존이 가족 문제가 된 것이다.

"부모는 나를 2번이나 죽음으로 내몰았고

결혼식까지 올린 여인은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갔다.

형제들은 잘 살고 있는데 내가 고생한 것은 누가 보상해주나?"

이런 원망이 할아버지를 괴물로 만들었다.

술 마시고 깽판을 치면 증조할머니가 나오셔서 말려야만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할아버지는 징병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받게 된 적이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본인 및 가족에 대한 보상이었다.

"강제 동원으로 사망한 자는 2천만 원, 생존해 있으면 1년에 80만 원"

나는 그 보상 내용을 듣고 참... 마음이 아팠다.

1년에 80만 원 이라니...


최근 불매 운동을 폄훼하는 정치인 또는 교수들의 발언이 들리고 있다.

나도 자유무역 경제 체제에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기자의 말처럼 삼성 스마트폰에도 일본 부속품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폄훼할 일은 분명 아니다.

나는 불매운동이 일제강점기에 가장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살다 돌아가신

증조부모님을 욕보이는 자들에 대한 저항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아들을 돈벌이로 탄광에 보내거나

딸들을 군인의 정액 받이로 몸 팔아 돈 벌라고 팔아버린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부모세대도 징용과 징병의 의미가 금지옥엽 같은 자식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 시대가 오죽 잔인했으면 면 서기가 친척 집에서 조차 조카를 지옥으로 보내는 서명을 받으려고 난리를 피웠겠나.

참고로 그 친척은 해방 후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나는 우리 아들에게 내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당한 이야기를 계속 전해줄 것이다.

이 글을 읽게 된 분들도 일제강점기를 계기로 어떠한 가정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보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다음, 각자의 판단으로 불매 운동에 대한 관점을 갖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