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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대중화, 그다음은?

기술을 넘어선 스토리의 시대 _ 한국기업들이 CES에서 강조해야 할 것들

by 이형주 David Lee

지난 11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지스타 2025의 핵심 키워드는 '내러티브'였다. AI 기술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새로운 그래픽과 기술을 선보이기보다 스토리 라인이 점차 중요해지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게임 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AI가 일상재가 되는 지금, 글로벌 마케팅 현장 전체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술이 평준화되면, 그다음은 무엇인가?"


와이파이가 된 AI


2000년대 초반, '무선 인터넷 지원'은 그 자체로 마케팅 포인트였다. 카페는 와이파이 스티커를 창문에 붙였고, 호텔은 이를 주요 편의시설로 광고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와이파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기본값이 되었기 때문이다.


AI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AI 탑재'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음성인식, 이미지 분석, 개인화 추천. 이제 이런 기능들은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기술 중심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현장에서 반복되는 풍경


전시회 부스에서, 바이어 미팅에서 비슷한 대화가 반복된다.

한국 기업: "AI 음성인식 정확도 98.7%, 처리속도 전년 대비 340% 향상, 27개 센서 탑재..."
바이어: "인상적이네요. 그런데 이걸로 우리 고객들이 뭘 할 수 있죠?"


바이어들은 제품 구매자가 아니다. 그들은 현지 시장에서 그 제품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미국 리테일러의 MD, 유럽 유통 체인의 구매 담당자, 중동 시장의 파트너. 그들에게 필요한 건 스펙이 아니라 '현지 고객을 설득할 이야기'다.


내년 1월 CES 2026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AI 기술이 대중화된 지금, 바이어들이 부스를 나서며 가져가고 싶은 건 기술 문서가 아니라 자기 나라 고객에게 들려줄 수 있는 '스토리'다.


애플은 스펙을 말하지 않는다


애플의 "Shot on iPhone" 캠페인을 보라. 카메라 스펙은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전 세계 사람들이 아이폰으로 포착한 삶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출산의 순간, 할머니의 미소, 거리의 일상. 기술은 배경이고, 사용자가 주인공이다.


델타항공은 CES 2025에서 스피어 돔 무대를 활용해 참석자들이 자동차로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전체 여정을 오감으로 체험하게 했다. 270도 영상, 바람, 커피 향. 이것이 경험 마케팅이다.

기술이 아니라 기술로 가능해지는 경험을 파는 것. 이게 차이다.

20250107_170942.jpg 델타항공의 스피어돔을 활용한 CES 2025 기조연설 모습 (출처: 필자)

한국이 가진 숨은 무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이미 스토리텔링 강국이다.

오징어게임은 전 세계를 사로잡았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데헌은 시청 수 3억 회를 돌파하며 오징어게임 기록마저 넘어섰다. 웹툰은 할리우드 IP가 되고, K-예능 포맷은 전 세계로 수출된다.


한국은 보편적 감정을 건드리는 내러티브를 만드는 법을 안다. 빠른 전개, 섬세한 감정선, 극적인 카타르시스.

문제는 이 능력이 기술 제품의 마케팅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삼성과 LG의 기술력, CJ와 하이브의 콘텐츠 감각. 이 둘이 글로벌 마케팅 현장에서는 따로 논다.


바이어가 진짜 원하는 것


바이어들이 원하는 건 세 가지다.


첫째, 현지 고객에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원한다.


"이 냉장고의 AI는 바쁜 맞벌이 부부가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시간을 하루 15분씩 줄여줍니다. 일주일이면 거의 2시간이죠."


둘째, 경쟁사와의 명확한 차별점을 원한다.


기술 스펙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의 차이. "다른 로봇청소기는 장애물을 피하지만, 우리 제품은 반려동물의 휴식 시간에는 조용히 작동합니다."


셋째,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마케팅 메시지를 원한다.


"기술 혁신"이 아니라 "더 여유로운 저녁", "더 깨끗한 공기", "더 안전한 주행" 같은 감정적 편익.


CES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이제 우리는 기술이 아닌 이야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AI가 보편화된 시대에 바이어들이 물어볼 이 질문들에 먼저 답하라.


1) 우리 제품은 고객의 어떤 '하루'를 바꾸는가?
_"스마트 세탁기"가 아니라 "아침에 10분 더 잘 수 있게 해주는 세탁기"

2) 현지 바이어가 자기 고객에게 할 수 있는 '한 문장'은 무엇인가?
_"이 제품은 당신의 ___를 ___하게 만듭니다." (빈칸을 채워라)

3) 우리 제품으로 가능해지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_ 실제 사용자의 경험을 모아라. 베타테스터, 파일럿 시장, 사내 사용자라도 좋다. 숫자가 아닌 감정으로 말하는 증거들이 필요하다

4) 경쟁사 대비 차별점을 '경험'으로 표현하면?
_ "처리 속도 2배"가 아니라 "대기 시간이 없는 경험". "센서 10개 추가"가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안전한 느낌"


결국 AI 시대의 글로벌 마케팅은 '인문학의 복수'다. 20년간 기술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면, 이제는 그 기술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양쪽 자산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기술력과 글로벌을 사로잡은 콘텐츠 파워. 문제는 이 둘을 하나의 브랜드 경험으로 엮어내는 일이다.


AI가 와이파이처럼 당연해지는 시대. 그 시대의 승자는 가장 빠른 칩이나 가장 정확한 알고리즘을 가진 기업이 아니라, 기술 너머의 인간 이야기를 가장 잘 풀어내는 기업이 될 것이다.


다음 바이어 미팅에서, 다음 글로벌 캠페인에서 이 질문을 던져보자.

"이 기술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그 답이 바로 다음 시대 글로벌 마케팅의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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