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깊이 끓여 우러나오는 차와 같다.

by 이형주 David Lee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우연히 합정동 교보문고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간 인문 코너에서였다. 내가 책을 선택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다. 책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거나, 아님 책 제목에 꽂히거나.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경우였다. 탁월하다는 동사가 생각의 눈높이를 뜻하는 사유의 시선과 만났을 때, 탁월한 생각의 높이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의 생각은 탁월했다. 더구나 그 생각들을 표현해내는 글솜씨는 소위 시중에서 잘 팔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베스트셀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트렌드를 쫒아가고, 처음 들어보는 신조어를 남발하는 책더미 속에서 그의 책은 무언가 입안이 텁텁하던 차에 마시는 깔끔한 차와도 같이 느껴졌다.


어느 한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내리읽어본 적이 별로 없지만, 최진석의 책들은 지금 계속적으로 읽힌다. 노자의 사상을 중심축으로 탁월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풀어낸 그의 책들이 지금 이 한 겨울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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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글은 노자 철학을 중심으로 탁월한 인간의 의미를 풀어낸다.

그의 책을 읽어 내려가다 차마 밑줄 치기도 아까워 책장을 반으로 접은 것만 수십 차례, 그러다가 어느 한 단락이 통째로 가슴에 와 닿는다. 아,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칠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단락을 한꺼번에 필사하는 것이다. 최진석은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이란 책에서 예술가에 대한 생각을 아래 단락처럼 써 내려갔다.

예술에서는 작가가 작품이다. 어떤 예술 작품이 일류인 이유는 일류일 수밖에 없는 그 작가가 그대로 작품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검열도 거치지 않아야 한다. 자기 몸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튕겨져 나온 자기 스스로가 작품의 형태로 새로 태어날 뿐이다. 무엇을 표현하려고 머리를 쓰는 순간 끝이다. 나는 화가나 조각가 혹은 피아니스트와 같은 레벨에서의 분류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미술가나 음악가로서 분류된 레벨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절정, 예술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적어도 그것이 예술이 되려면 어떤 사고도 하찮아야 하고 오로지 우주를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빛으로만 무장해야 한다. 예술가에게는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연인도 자기를 위한 열정의 파편이었을 뿐이다. 오직 햇볕을 수선스럽게 흐트러뜨리는 바람만 잠시 머물다 간다. 우주에 대면하는 오직 스스로의 자기 자신, 이것이 예술의 뿌리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제우스다. 제우스보다 더 나은 예술가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내 말이 맞다. 푸코의 다음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제우스는 누구일까요? 그는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존재입니다. 완벽한 순환성 속에 있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일종의 순수 상태의 자기 배려, 바로 이것이 신성한 요소를 특징짓습니다. 제우스는 누구일까요? 그는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p.357-358, 최진석, 소나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수려한 문장은 분명 무엇을 표현하려고 머리를 쓴 게 아니다. 한 호흡에 내달리듯 써내려 간 것이다. 이런 문장은 단기간의 연습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하나의 단락으로 정갈하게 다듬어진 것이다.


바람직한 삶이 아닌 바라는 삶을 살라는 그의 글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