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을 오랫동안 하면서 '진짜 나'라고 여겨지는 것과 에고를 느낌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진아, 참나, 영혼 그것이 뭐라고 불리든, 그곳을 찾아가면 무한한 평화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만 머무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에 내면 깊은 곳에 침잠하길 원했었다.
그 시절에는 평화로움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에고라고 여겼다. 그래서 과격분자였던 나는 에고를 제1의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남들보다 잘 나가고 싶은 마음, 내 처지에 대한 비관,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자격지심, 내 능력에 대한 의문, 적대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 그 깊은 뿌리에는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한 가지였는데, 그것을 억누르려고 무던히 노력했는데 그런 삶은 괴로움이었다.
평화로운 '진짜 나'를 찾아가면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단절되고 말았다. 일상에서는 사랑받고 싶다는 그 열망을 외면한 채 괴로움은 늘 근본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에고는 누른다고 눌러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에고는 이해하고 알아차려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에고는 에고만의 일이 있는 것이다. 에고가 생존의 방식이라고 믿는 대로 나를 위한 알람을 켜줄 뿐이었다. 사회에서 소외되면 잘 살아갈 수가 없다는 믿음 아래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신경 쓰도록 나를 채근했을 뿐이다. 일을 더 잘 해내야지만 더욱 성공하고,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을 것이라고 나를 채찍질했을 뿐이다.
사실 에고로 사는 삶은 역동적이고 즐겁다. 내면의 고요한 침잠보다 훨씬 다양한 즐거움이 있는데, 에고가 진짜 나라고 과몰입했을 때 괴로움이 몰려온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괴롭고 힘든 장면이 나와도 슬퍼하고, 눈물 흘리고, 감동받고 공감하지 않는가? 그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주어지는 감정적 롤러코스터를 편안하게 마음껏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고는 이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 중 하나인 것이다. 소외감도 느껴보고, 질투도 해보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아보고, 꿈에 그리던 사랑도 해보고, 다 그런 것이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닌가? 그런 에고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이, 에고에 빠지게 되면 어느새 과도한 몰입으로 괴로워질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것이 '진짜 나'와 에고의 조화를 늘 이루는 것이다. 나만의 고요한 시간에 빠져드는 시간을 가질 것, 강력한 에고가 등장할 때 그 존재를 부드럽게 알아차리는 것. 매일 해도 어렵지만, 계속 하다보면 어느 순간 삶의 아름다움이 더 잘 느껴지는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