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아이'라는 말이 이제는 좀 식상하다.
마음 안에 어린시절의 부정이나 결핍이 남아있고 그 감정을 오롯이 느껴주어야 떠나보낼 수 있다는 말에 20대에 정말 많이 울어보았다. 기억나지 않던 일들도 꺼내어 들추어 보면서 서럽고, 속상하고, 슬픈 마음을 안전한 공간에서 마음껏 내어보였는데, 그러고 나면 강한 카타르시스가 찾아왔다. 20대의 자취 생활은 그런 작업을 시도해보기 참 좋았다.
그 때의 나에게는 그 과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변하고, 내게도 점점 그런 행위들이 식상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첫번째로는 내 어린시절에 대해 과한 드라마를 부여한다는 점이었다. 서럽고, 속상하고, 힘들다는 감정은 다 허용할만하지만, 그 카타르시스에 맛을 들이면, 더 슬프고 더 아파야만 더 강한 정화를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을 할 때 마다 내 어린시절이 불행했다는 편향된 의식이 커져갔다.
두번째로는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자꾸만 원인을 찾는데 집중하는 것 보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서 내 삶을 잘 살아내는 방법을 익혀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치유와 힐링이라는 컨셉에 좀 많이 심취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번째는 마지막 심리 상담 때 느꼈다. 그 당시 심리 상담이 필요가 없었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담의 기회들이 많아졌고 가볍게 상담을 받아보았다. 그 때 내 앞에 놓인 약간의 고민 거리를 대화하면서 좀 더 명쾌하게 이해하고자 했는데, 상담사는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자꾸 떠올리게 했고 그 곳에서 원인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런 시절의 경험이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어른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하는 사고를 한 번 되짚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 때 알았다. 이제 과거를 돌아볼 때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때이구나.
이렇게 세 가지씩이나 이유를 쓰고보니 '내면 아이의 정화'라는 작업은 무용지물이었던걸까? 그건 아니다. 그 당시 내게 그 시간이 필요했고, 그걸 지나고 보니 이제 그 시기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라나 버린 것이다. 사춘기 아이가 어린시절 좋아했던 뽀로로를 더 이상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그럼에도 내 안에 아직 아이 2명을 키우고 있다. 한 명은 슬픔이 같은 아이인데, 문득 그냥 슬퍼질 때가 있다. 슬프고 외롭고 불안하다. 근데 예전 보다 더 희미해진 존재랄까. 또 다른 한명은 인정 욕구인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는 엄청 기뻐하다가, 원하는 만큼 인정 받지 못하면 속으로 미워한다. 어제도 친구를 만나 누군가를 험담하다가, '아 이거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그런거였구나'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부지불식간에 내면아이에게 휘둘려다닐 때가 있는 것이다. 꽤 자주.
그러니 누구나 마음 속에 아이 한 두명은 품고 사는 듯하다. 가끔 요동치는 날에는 같이 울고 떼써도 되고 그러려니 해도 되고 그러다 보면 지나간다. 이런 것이 셀프 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