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린 칼날처럼 날카롭던 햇살이 조금씩 무뎌지다 어느덧 보드랍게 부서져 산란할 무렵이 되면, 한적한 골목 어귀, 작은 식당 하나가 늦은 하루를 시작한다. 자칫 늦을까 싶어 예상 일정 보다 조금 일찍 움직인 덕에 예약해 둔 시간보다 10분 전에 도착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괜히 어슬렁어슬렁 9분을 더 흘려보내고 나서는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춰 문 앞에 섰다.
나름은 물릴 정도로 자주 경험했던 일이니 익숙해질 법도 한데, 홀로 식당을 들어갈 때마다 찾아오는 얼마간의 거북한 기분을 여전히 물리칠 도리가 없다. 의미 없는 헛기침을 한 번 뱉고는 문을 당겼다.
‘드르륵’
몸속 저항감을 대신 몰아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작은 미닫이 문 치고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정말 오늘도 오셨네요?”
안으로 들어가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제 자리를 안내해 주었던 작은 식당의 식구가 친절한 눈빛으로 말을 건넨다.
‘맞아, 그랬었지’
고작 하루 전 일이었는데, '오늘도 들르겠다 말했던 걸' 잊고 있었다. 아마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취해서였으리라. 어제는 달고기라 불리는 바닷물고기 튀김을 먹었다. 제주 바다에서 잡히는 자연산 제주 물고기란다. ’시그니처’라고 당당하게 메뉴판 맨 윗줄을 차지한 것으로도 모자라, 무려 이름마저 ‘달고기’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1년 동안 제주살이를 시작한 친한 동생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인 데다 가격을 보고 적잖이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나는 차마 이 예쁜 이름의 물고기를 못 본 체 그냥 지나칠 수가 수가 없었다.
식당의 식구는 뼈째 모두 먹어도 된다는 설명과 함께, 주문했던 달고기 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돌아섰다. 코 앞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달큰한 향은 채 입에 대기도 전에 식욕을 목젖까지 끌어올렸다. 젓가락을 들어 정성스럽게 달고기 배를 갈랐다. 껍질 안에 감춰졌던 뽀얗고 탐스러운 살점이 도드라졌다. 큼지막하게 한 점 배어 물었다. 입안 가득 살짝 신 맛이 도는 양념이 먼저 기름칠을 하고, 이어 부드러운 살이 뒤엉켜 입천장을 굴렀다. 같이 딸려온 뼛조각은 씹을 때마다 오도독오도독 경쾌한 소리를 냈다.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 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민망해 옆자리 눈치를 살폈을 정도다.
달고기 뼈가 반쯤 드러났을 때 만나기로 했던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 준비가 마무리되어 간다는 소식이었다. 배는 아직 반도 채워지지 않았고, 눈앞에 달고기도 한참 남아 있었지만, 시간을 보니 제 때 도착해 함께 식사를 하려면 지금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고민했다. 남은 건 싸달라고 할까. 나란 사람은 그런 말을 할 만한 주변머리가 없었다. 고작 생각해 낸 거라곤 ‘그래,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는 되지도 않는 핑곗거리였다. 그만큼 이 맛은 그냥 남겨 놓고 돌아서기 힘든 유혹이었다. 자세를 고쳐 잡고 허겁지겁 남은 달고기를 남김없이, 야무지게 씹어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을 나오기 전에 홀을 맡은 식당의 식구를 보며 말했다.
“어묵을 못 먹어봐서 좀 아쉬워요. 이러다 내일 다시 올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 나는 다시 찾아온 것이다. 지나가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기분 좋은 알은척을 끝낸 그는 오늘은 어제와 다른 자리를 내어주고 총총걸음으로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래봐야 채 다섯 걸음도 되지 않지만)
메뉴를 훑어보니, 혼자 온 사람은 어묵을 5개가 아니라 3개부터 주문할 수 있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식당에 걸맞은 작은 배려였다. 세상을 바꿀 대단한 결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선택한 어묵 3개와 함께 탄산이 들어간 하이볼 한 잔을 주문했다.
창 밖으로는 밤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고, 생각보다 술과 음식은 금방 준비되었다. 첫 번째 어묵을 다 먹기도 전에 나 홀로 여행자 두 사람이 차례로 식당 안으로 들어왔지만 미리 예약해 둔 여행자들에 밀려 하릴없이 돌아서는 모습을 봤다. 두 번째 어묵을 입으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여행이 끝나기 전에 저 사람도 다시 와서 먹어 보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꼭 음식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지만 포근한 공간, 그 공간을 채우는 살가운 식당의 주인들, 고개를 들면 창 밖으로 보이는 감색의 하늘, 홀로 하루를 보냈거나, 보내야 할 밤을 앞두고 찾아왔을 것이 분명한 혼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쩌다 보니 길면 한 시간 반 가까이 함께 나누는 밤.
보이는 거라곤 고작 뒷모습뿐이다. 서로 마주 보고 직접 말을 나누는 일도 없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낮을 배웅하고 다가오는 밤을 맞이하는 동안 낯섦이 사라진 나와 그 혼자들의 등은 어느덧 서로 닮아가고 있었다. 미처 알아채기도 전부터 이미, 무수히 많은 혼자들의 이야기를 소곤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