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omscrolling

by 최정식

스크롤을 멈추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 붕괴, 위기, 분노. 화면 속 세계는 늘 급박합니다. 소식을 따라가고 있다는 감각이 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정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정보 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른바 ‘doomscrolling’의 상태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층위가 덧붙여졌습니다. 릴스나 쇼츠 같은 짧은 영상 콘텐츠입니다. 이 콘텐츠들은 나쁜 소식만을 다루지 않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멈추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위기의 연속이든, 웃음의 연속이든, 화면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doomscrolling이 불안을 붙잡는 방식이라면, 릴스형 콘텐츠는 주의를 붙잡는 방식입니다. 결과는 비슷합니다. 사고의 개입 없이 시간이 사라집니다.


인간은 위험과 자극에 민감합니다. 이는 생존을 위해 각인된 특성입니다. 문제는 이 보편성이 기술 환경 속에서 극단적으로 증폭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위기는 간헐적으로 도착했고, 즐거움은 선택적으로 소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와 자극은 자동재생됩니다. 인간의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겨냥한 구조 속에서, 멈춤은 점점 더 어려운 선택이 되었습니다.


doomscrolling과 릴스 중독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같은 심리를 공유합니다. 통제감을 회복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세상이 불안할수록 더 많은 정보를 붙잡고, 삶이 무거울수록 더 가벼운 자극에 몸을 맡깁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로 회복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통제는 생기지 않고, 대신 피로만 남습니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고, 감정만 소비됩니다.


이는 이해하려는 태도가 사유로 이어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정보와 자극 사이를 떠돌 뿐, 판단이 개입할 자리는 없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가 던지는 파편에 반응하는 존재로 축소됩니다. 이때 소진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고의 깊이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개인의 의지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doomscrolling과 릴스 중독은 환경이 설계한 리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벗어나는 방식도 결심이 아니라 구조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덜 보겠다는 다짐보다, 언제까지 볼지를 정하는 일이 더 현실적입니다. 자동재생을 끄는 작은 선택이 사유의 공간을 되돌려줍니다.


스크롤을 멈춘다는 것은 세상을 외면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지를 선택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이 다시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아는 것과, 그 어두움과 자극 속에 계속 체류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인식이지만, 후자는 소진입니다. 저는 오늘도 화면을 내려놓으며, 세계와의 거리를 다시 조정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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