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년된 와인

by 최정식

약 12만 유로, 우리 돈으로 1억 원이 훌쩍 넘는 127년 된 와인이 열렸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프랑스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와인, 1899년산 로마네 콩티였습니다. 이 병을 연 사람은 싱가포르의 와인 수집가 수후 쿠운 펭이었는데, 그 이유는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위대한 와인들이 너무 자주 열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병을 투자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통찰을 나누고 관계를 잇는 경험으로서 열었습니다.


그 와인은 본래 마시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전쟁과 붕괴, 그리고 망각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존이라 부르고, 가치의 연장이라 설명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와인이 존재하는 이유가 과연 병 안에서 완벽하게 유지되는 데에만 있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많은 말과 선택, 관계를 ‘아직은 아니다’라는 이유로 봉인해 두고 살아왔습니다. 더 나아진 뒤에, 더 안전해진 뒤에 꺼내겠다고 미루며 시간을 저장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저장은 어느 순간 축적이 아니라 지연이 되었고, 지연은 의미의 소실로 이어졌습니다.


그 병을 연 선택이 깊이 남았던 이유는 값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유를 확증하는 행위가 아니라, 소유를 넘어서는 판단이었습니다. 병이 열리는 순간, 와인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자산이 아니라 함께 축적되는 기억이 되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마친 듯 보였습니다.


와인은 사라졌지만, 그날의 빛과 침묵, 그리고 함께했던 사람들의 기억은 남았고, 삶 역시 소유가 아니라 용기 있게 열었던 순간들로 기억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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