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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Feb 05. 2021

어쩌다, 등산

어쩌다, 산을 올랐다. 코트에 머플러, 그리고 운동화. 옷차림은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다. 예정된 일이 아닌데 예정된 일처럼 왔다. 오로지 단 한 줄의 톡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문득 '바람맞고 싶다.' 그뿐이었다.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아서 오직 나무가 소리 내는 바람이 부는 곳으로 향했다. 도심을 벗어나 산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냥 달렸다. 목적지 없음이 이토록 아낌없구나, 하는데 닿았다. 별안간 심장이 뛰었고 설렜던 건 가기 전부터였다. 달리면 보이는 풍경이 스치고, 스치면 또 안기는 풍경들, 삶이 다시 오는 것처럼 세상의 순간은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는 듯 달뜨기 시작했다. 공간을 이탈하는 것의 자유, 반나절만에 이룰 수 있는 혁명처럼 아무도 모르게  산을 다 차지했다. 산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산을 오르는 기차(?)는 산을 오르지 못하고 묶여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산기슭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으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도무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매표소 직원의 걱정을 뒤로하고 우리는 '걸어 올라가자' 그랬다. 동시에 나온 말이었는데 웃음이 터졌다 이상하게 만날수록 닮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오롯이 이 느낌을 가지고  나눌 수 있는 서로가 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심지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산꼭대기까지 스피드를 내며 달리는 기차 대신  느닷없이 느리게 산길을 걷는 일은,


하늘빛을 표현하면 사라질까 봐 품으면 투명해졌고 투명해지면 파고들어서 모조리 푸르렀다. 산꼭대기에 절이 있었다. 초를 밝혔다. 절을 하고 고개를 들면 텅 빈 침묵도 있었다. 모여서 펼쳐진 것들이 사계절을 품고 비어 있었다.  깊이 보면 곳곳에 계절이 스쳤다. 봄을 앞에 두고 하얀 눈길을 걸었고 모퉁이 낙엽은 어딘지 가을을 닮아 바스락거렸다. 산 위에 올라 서면 참 좋다. 산아래 구불한 길을 어떻게 걸어왔을까 대단히 감격스럽기도 하고 선물처럼 숨겨진 풍경은 한눈에 들어온다. 소리 내던 바람은 올라와 시렸고 내려갔다 다시와도 다른 바람이 내 주위를 맴돌다 파고든다. 아프지 않게 시원하다. 속삭이다 물든 지극한 사랑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랑 같은,




숲은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한결같았다. 잃어버린 것도 없이 잃어버려도 가볍다. 경이로움은 어떤 의미일까, 특별한 무엇보다 평범한 사실에 밤은 너무 길어도 낮이 오고 낮이 너무 짧아도 하루같이 하루가 와서 울컥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 같다. 산을 오르다 보면 물리적 거리는 마음의 거리보다 멀었다. 천천히 흙을 밟고 나무를 보고 하늘을 보면 바람은 나무 위에 웅성였다. 바람소리나무 끝자락을 쓸어갈 땐 더 그랬다. 가까워지는 하늘. 그대로 이쁜 거였다. 사람도 그대로 이쁜데 자꾸 비교하면서 이쁜 건 정해져 버린 것 같아 약간 슬펐다.


참꽃이 필 때면 오자고 했다. 지금은 겨우내 마른 가지 나무처럼 자라도 물오른 나무에게, 활짝 핀 꽃 말고 봉오리가 점점이 물들어 흩날릴 때 새벽바람 맞고 새벽처럼 오자고 했다. 그 말을 하며 내려오는데 해가 걸렸더라. 사무치는 빛으로 초원의 빛처럼 풍요로웠다. 왠지 아침해가 뜨면 들썩였고 저녁해가 지면 어딘가 겸허해졌다. 다 같은 해가 하는 일인데 떠오를 때와 질 때의 해는 오로지 삶을 물들였고 우리를 물들였다.



끝까지 배웅하던 산을 빠져나왔다. 어둠이 성큼 다가와 물들면 잠기는 숲, 되돌아갈 길 없어 돌아가지 않고 거기 있었다. 바람이 다듬어 주던 손길에 사로잡혀, 뒤돌아 보던 우리는 놓아주었다. 설레도록 흔들어 놓고선,


어제 오후의 일이다. 그런데 또 막 설렌다.

비슬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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