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얀 마텔

by 하루

1부. 집을 잃다

토마스는 사랑을 잃어버렸다. 사랑을 찾으러 떠나는 길은 지독하게 외롭거나 고독하다. 줄곧 달리고 싶었으나 멈추게 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신비한 이방인을 본다. 그가 타고 있던 자동차의 석유를 살충제로 속여버린 사람들, 언제나 문제는 사람들이었다. 도무지 좀 잡을 수 없는 자동차의 상태도 의심스럽지만 점점 지쳐가는 육신의 고통을 기꺼이 헌납하는 이유를 이해하기엔 너무도 험난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양치기가 두고 내린 치즈와 빵 한 조각과 꿀은 선한 인간성을 회복한다.


그 모든 고난의 길의 유일한 지표가 되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장은 묘하게도 현재의 토마스의 심정을 확인하고 달리게 한다. 똑같은 권태로움과 똑같은 고독의 본질, 잃어버린 보물을 찾고 있는 그 모든 순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충만을 향한 모색은 우아할 수 있을까. '동등하지 않은 자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서 그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우리가 그들보다 나을 게 없으며, 사실 우리가 더 못하다' 모든 일은 적막 속에서 다시 시작되고 절망을 살찌우는 절망과 분노, 두 감정 속에서 예의범절을 초월한 개인의 언어로 발견되는 울음소리마저 자신에게 낯선 타자의 모습일 텐데, 인간이 자초한 파괴를, 제3세계의 원주민의 자유를 생각한다.


집을 떠나 집을 등에 지고 달리는 자동차는 삶이 망각되는 순간 삶이 숨 쉬는 귀소본능처럼 사랑이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 엔진이 뜨거워지면 또 달린다. 우리의 심장이 뜨거워질 때와 식어갈 즘. 교회 문을 열어주는 여인이 누군지 몰랐다. 꿈에도. 뒤로 걸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게 했다. 높은 산이 없는 포르투갈에서.


한 남자나 여자가 살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을 테지만, 어떤 체계 안에서 작은 부품은 쉬지 않고 굴러가야만 했다. 92쪽

개별적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한 집단으로서 노인장과 노인장의 양들은 시소의 맞은편 끝에 있고, 그 가운데 어디쯤에 지레 받침이 있습니다. 양쪽은 균형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보다 나을 게 없지요. 105쪽

고통에 시달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지만,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뭔가를 하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117쪽

인간은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뜨게 해 줄까? 고난의 결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까? 127쪽


2부. 집으로

해부하듯 읽었다. 시간과 공간을 이동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재와 연결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시점에 일어나는 효과를 제 각기 다른 장면을 통해 보여준 덕분이었다. 차츰 연결고리가 생기고 비유와 상징은 어떤 사람의 상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람에게 간다. 인간이 우등하다는 사실만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믿음은 의심보다 앞서야 한다. 인간이 머리에 이고 산 세월이 맹목적인 이성이라면 그 삶은 고단하기에 이른다. 어떤 조건은 조건 없이 구원받고자 한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믿음이 사랑으로 회복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는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은 늙지 않고 안될 것 없이 가능하게 했다. 현재의 한 사람의 자취가 우연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역사에 남는 일이며, 역사를 창조하는 것보다 이야기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하지만 각자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느끼게 마련이다. 뒤로 걷는 이방인이 마을을 떠나던 날,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얼굴을 잊을 수 없어서 그 뒤의 기억들은 소멸되고 덩그러니 그 기억만 남은 체 뒤로 걷기 시작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은 어떤 익명성이 거부된 조건에서 이해받는다. 어떻게 살아온 삶이던 우리에게 여기가 집이니까.


우리 모두를 압도하는 그 교활하고 강제적인 부재를 탐색한다. 죽음은 무엇인가? 시신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다...... 모퉁이로 돌아서는 죽음의 옷자락이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자취를 감출 때, 그는 죽음이 벌인 일과 맞닥뜨린다. 165쪽~166쪽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에 은혜를 베풀어요. 예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감동시키는 한, 우리의 놀라운 상상력에 지문을 남기는 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우리 역시 그와 함께할 것이라고 차분히 확신하면서 세상을 거닐었어요. 그리고 말이 아니라 조용히 이야기를 타고 왔지요. 187쪽

불굴의 용기는 연약함 옆에 자리를 잡아요. 그리고 이해의 빛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달하죠. 우리는 본질적으로 중립적인 사실들을 얻고 나면, 그 사실들에 의미를 새기는 하나의 해석을 얻어요. 190쪽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대단한 선도, 그렇게 대단한 악도 몰라요. 우리는 그럭저럭 중도를 견지하며 살아가죠. 197쪽


3부. 집

집으로 돌아왔다. 돌고 돌아 그곳이었다. 계획된 우연처럼 돌아온 그곳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오도는 피터의 슬픔을 씻어주고 긴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 준 구원자로 왔다. 그 품에 안긴 피터를 두고 홀연히 떠났다. 피터의 부재를 안고 오도는 피터의 마음을 만지고 등을 쓰다듬어 준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인척 하는 것보다 오도의 행동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 이 되었다. 오직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연이 주는 선물처럼 감정을 빛나게 한다. 사람처럼 오래 갈등하고 오래 고민하고 오래 슬퍼하지 않는다. 사람의 특징은 어설프다. 그래서 사람이 위로받는다. 이상한 동반자 오도가 말없이 안아주면 피터도 나도 하나같이 위로받는다.


오도를 종교적 구원처럼 신격화하지 않기로 한다. 그냥 자연이게 두고 싶다. 현대 사회의 피로감이 밀려와 적막을 기다리는 순간이 그립다는 건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품이 자연이면 좋겠다. 합리적 이성보다 감성을 두드리는 자연의 언어는 언제나 다정하다. 하늘은 높고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면 바삭해지도록 마음을 널어 말리면, 여행 중인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오도도 우리도.


이따금 오도가 시간을 호흡한다는 생각이 들어,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난 오도 옆에 앉아서 그가 매분, 매시간으로 엮인 담요를 짜는 것을 지켜보지. 큰 바위 꼭대기에서 해넘이를 보면서 오도가 공중의 뭔가를 손짓하면, 장담컨대 내 눈에는 안 보이는 형상의 모서리를 조각하거나 표면을 다듬는 거야.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 시간을 짜고 공간을 조각하는 존재와 함께 있는걸. 내게는 그걸로 충분해. 366쪽


긴장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그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감정의 찌꺼기 따위는 없다. 동물들은 현재의 순간에 중심을 둔 이런 종류의 감정적 기억상실 속에서 산다. 소란과 격발은 마치 먹구름과 같아서 극적으로 일어나지만 어느 순간 잦아들고, 그러고 나면 다시 한번 푸른 하늘이, 영원히 푸른 하늘이 되어 간다. 382쪽


풍경은 여느 때와 똑같지만, 익숙하다고 감동이 사라지진 않는다. 지평선까지 금빛 도는 노란 풀로 뒤덮인 거대한 사바나가 평 펴지고, 드문드문 검은 바위들이 있다. 늦은 오후가 만개한 하늘을 제외하면 단출하고 아름다운 전망이다. 그들 위쪽으로 공기의 부피는 어마어마한다. 그 안에서 해와 흰 구름이 장난을 한다. 풍성한 빛이 말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하다. 403쪽


커다란 세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곳. 그 길을 함께 걷고 숨 쉬었습니다. 힘들기도 했지만 힘든 건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곁의 쉼이 있는 그곳이라면 그곳이 어떤 곳이던 힘들게 오르기만 할 것도 아닐 겁니다.


아침부터 비가 쏟아집니다. 그곳에도 비가 오겠죠?
사바나의 안개가 더 짙어지고, 자욱해도 보이는 코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