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_서머싯 몸

by 하루

정말 바빴다. 도저히 글 한 줄 쓸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토록 절망일 줄은 몰랐다. 정지된 글과 글 사이에서 꼼짝없이 갇혀버린 듯 멍해졌다. 삶이 결코 걸작 일 필요 없는 나와 시간 사이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진 일주일을 보내고 앉는다. 보내고 나면 아쉽고 다시 담으면 그 자리에서 소멸해버리는 것들이 마음으로 깊이 파고들 때 정작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몰입한 시간 그 후, 남겨진 것들에 대한 허망함을 스트릭랜드도 알았을까? 예전에 읽고 올려둔 글을 바탕으로 조금 더 붙여 다시 올린다. 원래는 다시 읽고 다시 만지고 다시 다듬어 보려고 했는데 이제 와보니 그건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그땐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일이 무너졌다. 부딪히면서 알아가는 나의 개별적 입장에 대한 변명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 다소 늦었다.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 기 바랐던 것을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되는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 거죠. ” 299쪽


타이티 섬의 달은 유난히 맑은 빛 같다. 그 섬의 나무들과 바다를 순하게 흐르는 영혼 색, 그토록 열정을 쏟아낸 후 남겨진 것도 없는 색, 눈을 뜨고도 보이지 않는 것을 벗어던지고 눈을 감고도 보이는 것들에 마음 놓아 그리고 또 버린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꿈꾸는 세계는 죽음조차 이토록 무심하리만치 자연스럽다. 세속의 정돈된 질서 안에서의 불편함은 개별적 필요에 의해 탈피해야 하는 것이지 순순히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지켜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사회적 질서와 윤리에 어긋나는 도덕적 행위는 묵인해도 된다는 것일까? ​ 또한 묵인할 수 없는 이들의 거짓과 위선으로 분장된 삶의 방식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떤 특정한 지위로 이름 지워진 세속의 위치성을 벗어난 자발적 선택은 어떤 사회적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자주 드러내는 냉소적인 태도와 무관심은 세상이 어떤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지 않는 근본적인 가치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최소한 현실도피는 아니었음은 알겠다. 물론 세속의 시선을 거부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모든 방식의 삶에 있어서 양심의 가책을 좀처럼 느끼지 않는 것이 면죄부가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스스로 그러한 존재는 빛날 수밖에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명과 고립된 셈인 요즘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물질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구 공동체가 가동을 멈추고 사람들은 서로 되도록이면 피한다. 이제는 6펜스가 있어도 안 되는 일들이 생겨난다.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는 도시의 달빛도 서늘해지고 나란히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는 점점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면 세속적인 인간의 굴레에 생긴 염증을 더는 방치하면 안 되겠다. 처음 인간이 지닌 가치 회복은 무수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기도 할 텐데, 어디선가 타이티 섬의 달처럼 여기도 그 달이 뜨면 좋겠다 하고 창 너머 달을 찾아 기웃거리는 새벽이 깊어간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없이 보이지 않는 달을 본다. 사실 어젯밤 창가 맨 위에 빛나던 달빛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대로 두고 싶었다. 담지 않길 잘했다 싶었는데 달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매달려 있다. 저 높은 하늘에


“작가란 글 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6-17쪽


신형철은 문학은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어떤 시선에도 아랑곳없는 자신의 신념이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만 그치지 말아야 하는데 쉽진 않다. 그러나 루틴은 한 가지 실천에 주목하고 리워드 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비롯될까. 타자가 아닌 자기를 향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56족


존재는 어떤 특정한 사실과 사실로부터 취사선택을 한다. 어떤 일관성을 요구하지만 어떤 다양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사실로 존재하는 그것들이 사실로 존재하는 순간 어떻게 그 차이를 봉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난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잘못 찾아온 손님이 되기도 하고 또 그런 그들을 보기도 하는 존재방식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69쪽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라는 속담이 언 듯 떠오른다. 분명 입장 차이는 존재한다. 세상에는 참지 않는 사람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이 있다. 여전히 불평등이다. 무게 중심의 아래에서 겨우 견디고 있다. 우선 헤어 나오려고, 그들의 위치는 그대로 바뀌는 법이 거의 없다. 빠져 죽지 않으려면 절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했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 가 문제가 아니라 일단 빠져나오고 싶었던 지난 일주일 었다. 위로가 된다.



" 아스팔트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 70쪽


나는 믿는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고 알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인이면서 시인인 줄 모른다. 사소한 풍경이 쉬이 지치고 힘든 순간이 오면 오히려 빛난다. 무너지는 하루를 보내면 빛나는 하루가 온다. 날마다 새날이 와 주면 아침이 빛나서 나를 설레게 하고 그 순간 심장이 가렵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알 수 없어서 뭔가 시작되면 끝도 새로운 시작이 된다. 저마다의 의미는 특별해지니까. 나는 백합꽃을 참 좋아한다. 마음이 한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77쪽


책임과 의무, 자유와 권리 이런 단어들이 주는 의미에 길들여져 있다. 오랜 세월 훈육의 결과는 의심 없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하고 규칙을 거스르거나 문제 제기를 자른다. 순응적이다. 이것이 바로 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동원된다. 또한 국민의 의무로 규정도 사실에 순응하는 당위성이기도 했다. 누구를 위한 적인가. 자신을 단죄하는 방식의 시스템의 오류를 바로잡는 시선이 필요하다. 더 이상 무력하지만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은 알아보는 거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 보아야 해요.” 102쪽


더크 스토로브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을 가져온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인물은 아니지만 사랑에 대한 그의 영원한 성실함과 정직함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이어주는 영원한 아름다움의 승계자 같았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 그 안의 마음이 별처럼 반짝였다.



"난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112쪽


행복이란 표면적으로 문제없음이 아니라 실패를 하고 실수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다만 무조건적인 애씀과 쓸모 있음이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찾아가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 말이다.



"그는 마치 언어로는 기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로 설명해 보려고 애쓰는 신비주의자 같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 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그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 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 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돼먹지 않은 과장된 수사로 장식하려는 버릇이 있어 그 때문에 감수성이 무뎌지고 만다. 신령한 힘을 어쩌다 한번 체험하고선 그것을 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는 돌팔이 의사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남용함으로써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192쪽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아름다움에 사람이 빠져있다면 그건 아름다움에 적합한 단어들의 만발한 집합이자 아름다움이 식어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사람의 전부가 스민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삶 속에 발효되면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세상은 그대로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은 내 마음도 보태어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 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211쪽


부질없다 여기던 사실들과 모호하다 못해 부정되는 사실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애정이 위태로울 때도 교신한다. 소통과 공감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막히게 되는 순간의 적막마저도.



“우리 생활은 소박하고 순진합니다. 야심에 물들 일도 없고,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봐야 그건 우리 손으로 해낸 일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런 자부심뿐이고요.” 279쪽


소박한 일상의 시작은 당연하다고 여기던 사실에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되는 그 어떤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해하며 신뢰하는 것이다.



이 책은 삶을 잠시 쉬어가라고 한다. 자꾸 문장들이 끌린다. 물론 여러 표현들을 볼 때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 여성에 대한 표현이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티아레의 등장은 전 근대적인 사회 여성의 주도성을 드러내고 다소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는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자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 방종이라고 규정된 사실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문명에 내재된 보편적 욕망과 개별적 욕망 사이 억압된 휴머니즘에 대한 사회적 해석과 인간의 해석과의 개입이 줄어들기를 바라며, 인간 본연의 순수 의지에 대한 가치가 저평가되지 않길 바라며, 어느 곳 하나 소외되지 않고 평온하길 바란다. 또한 자신이 느끼고 설레는 그 모든 것만큼 행복하고 자유이길 바란다. 그것이 윤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바쁜 사이, 책의 마음이 와 주어 고맙고, 책의 마음을 찾고, 책의 마음을 다시 만진다.
제법 바람이 다르다. 어제와도 다른 뜨거움 뒤 저만치 가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