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쪼가리 자작, 밝고 어두운.

by 하루

가령, 짬뽕도 먹고 싶고 짜장면도 먹고 싶은 마음이 속절없는 순간이 오면 도무지 흔들린다. 미세한 균열을 부추기는 바람의 방향이 자주 바뀌고 선택은 느려진다. 오래 어쩌면 배려는 넘치고 행동은 굼뜬다. 갈팡질팡 양보도 아니고 배려도 아닌데, 서로는 화합을 이끌어 내는 냥 호기롭다.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필요에 의해 편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프레임에 갇힌다. 마치 파놉티콘 같다. 열린 듯 꽉 막힌 출구는 느슨한 통제로 두렵다. 마치 양날의 칼날처럼 서늘하다. 또한 서로 다른 것을 요구하는 데 결국 같은 사람이 돼버리는 이 난감함은 어찌 설명해야 하는지 대략 난감하다. 먹는 음식 하나에도 이럴 지경인데 하물며 죽고 사는 일에 대한 집착은 태초의 비밀이 태어나면서부터 일 것 같다. 삶과 죽음이 하룻밤 나무 그늘 아래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나 달콤한 기지개를 켜는 순간 찰나의 생이 다한다면, 못다 한 삶으로부터의 선택지는 어느 정도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도 싱겁다. 경계에 시달리는 부분의 부분들이 전체가 되고도 가리지 못하는 진실은 조장된다. 가능한 일반화시켜버린 힘의 크기는 늘 하나처럼 두 개의 공간에서 공존하다. 선 하나 그어놓고 마주한 우리의 현실 역시 녹녹하지 못한 건 명백하다.


요즘 핫한 사회 이슈들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코로나 이후 더욱 심화되는 불평등 문제는 사람의 본질을 훼손하고 행위는 인권을 침해하기에 이른다. 차별의 근원이 되는 선, 누구에 의해 여전히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가난의 크기는 질병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속성을 확장시킨다. 무엇으로부터 평등해야 한다. 층위에 따라 제 자리에서의 제 몫이라고 말하는 자의 힘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공고해진다. 힘의 크기가 분산되고 두려움이 전부인 약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실함을 저버린 이기적인 미러링을 통해 혐오를 전파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오염의 것으로 선을 그으면 어느 한쪽은 깨끗해진다는 논리, 여전히 두려움은 약자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사랑을 믿을 수 있을지도 의심한다. 빈곤은 사랑을 가지지 못한다. 가난은 계속 가난해야 하고 부자는 계속 부자여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늘 그렇듯 선을 긋고 이미지를 상징화한다. 이런 방식의 논리는 언제나 제한된 모순을 동반한다. 시들해져도 규범은 서 있고 그 반대로 도주할 우려도 없다. 흑백논리, 어둠이 있어야 밝음이 있다.라는 명제를 살펴보면 아주 영리한 메커니즘을 동반하다. 이것과 저것이 상반되게 구분 지어 비교한다. 있고 없음의 존재방식의 차이, 애초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명명하는 일은 영리하다. 불행하게도 정상은 어느 한쪽 편에만 서게 만든다.


주체와 객체가 혼재된 모호함, 의식 없는 부정이 긍정되고 미러링 되면 판과 판 사이가 어긋나거나 끊어진다. 그리고 무너진다. 수없이 연결된 존재들이 따로 또 같이 흩어지면 조건 없이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염원이 애가 탄다. 어떤 의도된 명분 아래 분리불안이 나타나는 사회를 진단하면 자주 아프지만 어딘가 소속되고 싶은 중성의 것들, 무리 사이 존재하고자 하는 소수의 욕망은 지워진다.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조화롭지 않다. 다정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 선을 넘어가면 절벽 같아서 보편적인 나약함은 포장된다. 상식에 맞는 행동 외의 것은 아웃사이드로 몰아낸다. 마치 캘리버의 마녀사냥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도무지 규정된 상식이 상식 밖이다.


문득 아수라 백작이 떠올랐다. 어렴풋이 이미지가 닮아있던 생각을 기억해 내려고 했는데, 그냥 악의 인물 같다. 얼굴의 어두운 반과 밝은 반, 왠지 자작과 겹친다. 이미 외모는 선입견을 조장하고 있다. 차별을 일상으로 품어내는 평등은 흐를수록 자주 그늘이 진다. 모든 사회 불평등이 재단되자 잘린 부분들이 아우성이다. 선과 악의 사랑을 동시에 품은 존재 역시 경계에서 서성인다. 어떤 선택도 행복할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부정성이 본질을 모르는 방향으로 분노를 조절하고 증명한다. 통제할 수 있는 처방전이 시급하다.


순환하는 계절의 시작은 경계 없이 시작된다. 많은 말보다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이 말해주는 연속성은 어쩐지 평화 같다. 단절된 벽 앞의 바람은 나아가지 못하고 휘몰아치다 흩어진다. 벗어나지 못한 어떤 모호함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숨겨진 불평등은 깊도록 혐오를 부추긴다. 자꾸 가른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배제된 이들의 영역은 안전하지 않아도 무심하다. 끊임없는 차별을 내면화시킨다. 거부하지 못하는 두려움만 커지고 오로지 작아진다. 그 경계에 선 이들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불안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은 선을 밟았다가 다시 건너간다. 제 자리로, 안전함을 추구하는 책임감은 용기 대신 선을 지키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어느 한쪽의 반, 그 반대편에 서성이는 그림자를 본다. 사정없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반의반의 그림자를 빛으로 창조하는 순간, 매일 우리가 맞는 하루의 아침이 사랑을 위해 다시 호명되고 빛나는 순간, 잊혀진 빛이 생명처럼 스스로 피어나길 바라며,


"욕망은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이에요. 논리가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죠. 다툼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삶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카오스, 혼돈입니다. 혼돈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당신만의 의미를 창조하세요, 혼돈과 갈등은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문득 지그문트 바우만의 밑줄을 옮겨온다.



늦은 밤, 인간의 마음을 생각한다. 절반의 마음과 절반의 마음이 만나는 자리를 소환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