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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구 Nov 14. 2023

평행선은 언젠가 만난다.

오랜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때

간단한 수학 O/X 퀴즈를 하나 내보겠다. 수학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문제) 평행한 두 직선(//)은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난다. (O/X)


#1

흰 종이 위에 두 직선을 나란하게 그어 보면 정답이 'X'임은 쉽게 알 것이다. 사실 평행이라는 단어에 이미 '나란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독자를 너무 기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만약 적도에 위치한 어느 두 지점에서 북극을 향해 뻗어 나가는 두 직선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구본을 둘러싼 적도 위에 있는 아무 두 점을 잡아, 북극을 향해 직선을 긋는다고 상상해 보자. 두 직선이 만나는 지점에는 북극곰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평행선 문제와 북극곰 문제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지구본을 바닥에 펼친다고 상상해 보자. 적도에 해당하는 원 모양 지구본 둘레는 쭉 뻗은 직선이 되어 있다. 또한 북극에서 만난 두 직선은 적도를 나타내는 직선과 수직을 이룬다. 이러한 성질을 만족하는 두 직선은 서로 평행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행한 두 직선은 절대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북극에서 만나는 상황과 맞지 않는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걸까? 그 이유는 수학에서의 '평행'은 평면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종이 위에 직선 하나를 긋고 그 직선과 수직인 또 다른 직선 두 개를 그어보면, 두 직선이 나란히 뻗어나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지구본은 평면이 아니다. 그래서 평행선 이론을 똑같이 적용하기 위해 지구본을 종이처럼 펼친 것이다. 정리하자면 똑같은 평행선이라도 놓인 위치가 평면인지 곡면인지에 따라 만남의 여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2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가장 오래된 수학 이론 중 하나인 ‘평행선 정리’이다. 도형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의 수많은 이론이 평행선에서 나왔다. 평행선에서 출발한 기하학 이론은 수천 년 간 ‘불변의 진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지구본과 같이 평행선 이론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 발견됨에 따라, 수학자들은 기존 평행선 이론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대신 새로 등장한 공간에서도 적용될 수 있도록 평행선 이론을 수정했다. 마치 한 점에서 만나버린 두 직선을 만나지 못하도록 억지로 떼어 놓은 셈이다.


평행선 이론은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해 온 것들이 한순간에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평면에서 지구본 위로 옮겨간 평행선의 운명이 뒤바뀐 것처럼,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진실이 거짓이 될 수도, 거짓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온 세계인 '매트릭스'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나 역시 오랜 세월 굳게 믿어 온 것들이 한순간에 깨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특히 회사라는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서 일에 대한 '매트릭스'가 바뀌었다. 세상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회사에는 정답이 존재했다. 노력보다는 성과를 내야 하고, 개인보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게 옳다고 여겨지는 곳이 회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과 어긋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성과에 비해 열심히 일하고, 팀원과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낭만 사원'이었다. 하지만 신규 사업 수주에 실패하고, 콘텐츠 제작 일정이 늦어지는 등, 회사에는 좋지 않은 일을 지난 한 달 동안 여러 번 겪어 왔다.


오랫동안 믿어온 일에 대한 가치관을 무너뜨릴 때가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내 생각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파란 약을 먹고 진짜 세계를 선택한 주인공처럼, '개인보다 팀, 노력보다 성과'를 우선시하는 회사를 '진실된 세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행선 이론'이 불완전한 이론임을 인정하고 새로운 이론으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 자신보다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방향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혼자서 머리 싸매는 대신 사수에게 도움을 구하는 걸 택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해서 무책임하고 무능하다고 핀잔을 주는 상사는 없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줄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가 오랜 세월 진실이라 믿어온 것들은 땅 속 깊게 박힌 뿌리와 같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변화의 강풍'이 불어 닥치면서 굳건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분명히 찾아온다.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진실의 땅으로 새 발을 내딛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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