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나라 요정이 내려왔나보다

by 시누의 서재

*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캡처.PNG 출처 :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보니 문득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엄마는 아들에게 '비의 계절'이 오면 구름나라에서 엄마가 내려올테니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곤 그렇게 갑작스럽게 온기를 잃었다.


몇 년 동안 장마라고 해봐야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만 가득했던 무더운 장마였기에 이토록 젖어있는 계절이 낯설다. 밖을 나서면 탁 트인, 그럼에도 보글보글 끓기 직전인 주전자 속을 걷는 것만 같아 올해의 여름처럼 집에 들어앉아 축 젖어 있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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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엔가 2020년의 여름을 추억하자면 '유난히도 길었던 장마' 딱 그 한 마디만 남을 것 같다.

이십대의 후반기, 그 후반기의 후반기를 다시 달려가고 있는 나이에도 집앞의 작은 하천이 얼마나 불어났는지 물구경을 두어번이나 떠났던 계절. 어릴 적 시골에 살 때, 그것도 큰 강을 바로 끼고 도는 강가에 살 때는 여름이면 마을 안쪽 할머니댁으로 온가족이 야밤에 난리를 쳤을 만큼 비로 가득한 것이 당연했던 장마였다. 도시에 살게 되면서 우연찮게 마른 장마가 겹겹이 매해를 지나지 않고 찾아와서 한동안 까먹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게 장마였지' 머리가 조금씩 굳어져 가는 어른에게 '비'라는 날씨를 친절히 알려줬던 계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도 커피를 잔뜩 머금은 에이스 과자처럼 눅눅해질 법도 하다.

그럴 법도 한데, 비가 가득 내릴수록 외려 내 마음은 보송보송 잘 마른 손수건 같다.

창문 하나를 두고 수천 만 개의 빗방울로 시원하지도 않은 무거운 증기로 가득한 바깥으로부터

나의 작은 공간을 보호하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댄 것처럼.

나의 마음은 나의 생각들이 그 안쪽을 잘 말려주어 보송보송하다.


비가 온다고 덩달아 눅눅한 마음을 품기엔 언제든 와르르 쏟아질 수 있는 위태위태한 마음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끔 며칠이, 아니 몇 달이 훌쩍 지난 어느 하루를 곰곰 생각해보면 나의 마음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갖가지 꿈꿔왔던 것들은 각종 '박약', '미흡', '부족', '태만' 등의 문제 위에 올라타 별반 앞으로 다가온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지박약, 정신박약, 계획부족, 근무태만, 노력미흡 등이 될 수 있겠지.

다행스럽게도(불행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름의 소위 회복 탄력성이 좋은 편이기에

어릴 적부터 대책없이 긍정왕이었기에

어쩌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많은 것들을 놓아버리고 감정의 동요를 스스로 막지 아니할 수 있음에도 나는 굳건히, 굳건히라고 믿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요함을 지키고 있다.


일렁이지 않는다고 해서 위태하지 않은 것은 아니더란다 그러나.

스스로도, 가끔 잠을 자려 누워 눈을 가만히 감으면 심장의 안쪽부터 강하게 밀려오는 부글거림이 애써 잔잔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오는 어두운 감정들을 차분히, 애써 차분히 손으로 직접 적어가며 달래주지 않으면 '탁' 하고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위태위태하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그 위태로움을 집앞 천변을 뒤덮어버린 불어난 강물이 되지 않게끔

하루의 순간순간들을 잘 다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또, 위태로움을 든든한 양식 삼아 미루고 미뤄왔던, 바쁘다는 핑계로 어느새 두 달을 훌쩍 넘긴 이곳의 글을 쓰게 되었다. 안 쓰기 시작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는 부끄럽다가 그것마저도 지나니 게으름이라는 나의 가장 오랜 벗을 다시 만났구나 생각했었다. 아마 다른 날이었다면, 다른 날씨였다면 모른 척 하루의 바쁜 '척' 속에 넘겼을 이 글을 비가 일깨워주는 나의 날 것 그대로의 감정 덕분에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또 위태로움을 잘 넘기었다.

그리고 난 나의 마음이 위태로움에서 거센 강물로까지는 번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줄곧 애써갈 것이기 때문에.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구름나라의 요정 엄마가 가족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이었다. 비의 계절이 지속되는 시간만큼. 이만큼이나 흠뻑 젖은 장마라면 세상 어딘가에서 평소엔 내려올 수 없는 요정과 남겨진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는 벌어지지 않을지언정 비를 서로 좋아하는 어느 연인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한 번의 계절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장마 속에서 누군가는 흠뻑 젖은 마음을 보송보송 말리려 노력하기도 한다. 비가 올수록 마음은 더 보송해진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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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수가 가사에 '읽기 쉬운 마음이야'라고 쓴 것처럼 나는 위태로운 마음이다. 그럼에도 방금 뽑아낸 휴지같이 보송보송하다. 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번 장마가 미울 수도 있겠다. 마음이 눅눅한 사람이라면 이번 장마가 마음을 말릴 틈을 안 주는 야속한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별볼 것없는 위태로운 마음도 보송보송하다. 지루하게도 내리는 비가 미운 모든 사람들이 창문 하나 사이로 시원한 각자의 공간처럼 살갗 속의 마음만은 보송보송 잘 말라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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