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에 옷은 한가득인데 막상 입을 만한 옷은 없다. 꺼내 들면 다 철 지나고 유행이 지난 빛바랜 옷들이다.
운동복 서랍은 더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반 친구들과 단체로 맞추었던 엉덩이가 다 해져 뻥 뚫린 반바지가 아직도 맨 구석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책상 서랍에는 한 번 쓰고 제자리에 안 두어서 다시 필요할 때 못 찾아 매번 새로운 친구를 맞이하는 테이프와 풀이 한가득이다. 냉장고에는 한두 번 쓴 대파가 랩에 돌돌 말려서 쪼골쪼골 말라가고 있다.
1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좀 버리라고 많이들 말한다. 나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버려야지 버려야지 해도 옛날에 함께 했던 기억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옷이 피붙이라도 되는 듯 유난이다. 좀 정리를 하려고 봄 아우터를 주욱 꺼내 보았다. 옷장 문에 옷걸이를 살짝 걸쳐 놓고 걸려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2000년대 스타일이다. 2016년쯤 산 옷인데 왜 2000년대 스타일일까. 어찌 됐든 지금은 못 입는 옷이 맞다. 입고 나가면 북한에서 남파된 공작원 취급을 받을 거다. 어디 중고로 팔 수도 없다. 이런 옷을 남에게도 입히고 싶진 않다.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안타까운 녀석인데 미련이라는 게 참 무섭다. 바로 옆에 의류 수거함도 있고 정 마음이 마뜩잖으면 버려도 되는데 쓸데없이 옷장만 묵직하게 하는 옷들을 떠나보내는 게 쉽지 않다.
냉장고 안에 박혀 있는 다진 마늘이며, 대파, 김치찌개에 반쯤 넣고 남은 돼지고기들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은 아니더라도 내일은, 모레는, 아니 최소한 이번 주에는 밥해 먹을 때 쓰겠지.
대파를 지지고 튀기고 삶고 데쳐서 다 먹어버리든 과감히 떠나보내든 해야 하는데 냉장고 속 식재료를
쓰는 일은 또 한 번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나의 집은 미련으로 가득 찬 집이다.
옛날의 내 모습이 그리워 내 옆을 지키고 있는 것들로 가득 찬 집.
가끔 큰맘 먹고 이것저것 다 비울 때가 있다.
어디서 받아 온 홍삼 스틱도 버리고, 이제는 사라진 빙수집 쿠폰도 버리고,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하고 뽑았던 300쪽짜리 재무 인쇄물도 버린다. 버릴 때면 또 한 번 좁은 방안에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 있었나 놀라기도 한다.
언젠가는 추억이 되지 않을까, 언젠가는 다시 보지 않을까 버리는 순간까지도 미련이 한가득이긴 하지만
버리는 날로 정한 날에는 과감하다. 쓰레기봉투에 가득 구겨 담아 꽁꽁 묶어서 더 미련 생기기 전에 버려 버린다.
비우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 비워진 건 좁은 방일뿐인데 괜히 내 마음이 비워진 것 같다.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된 것 같다. 적어도 버려진 물건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주신 메밀차니까 언제 꼭 마셔야지 가끔 마음속을 어지럽혔던 생각들은 그 순간 없어진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집중하기도 모자란 마음의 틈 사이를 조금씩 메우고 있던 것들이 사라진다.
좋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해주었던 물건들도 하나 둘 버리면 좋았던 시절이 가끔은 내 발목을 잡았구나 싶기도 한다. 버리고 나면 깨닫게 된다.
분명히 가끔은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도 언젠가 다시 찾을 티백 하나도
이제 3번만 더 가면 되는데 벌써 1년째 안 가고 있는 카페 쿠폰도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는 그다지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뭐든 가득 쌓아두면 새로운 것을 다시 곱게 채워 나가는 데에 방해가 된다.
그러니 가끔은 색 바랜 옷도, 슬슬 먹을 수 있나 걱정이 되는 남은 스팸도, 중간고사 기간을 불태워 줄 뻔한 빈 출력물도 보내주자. 우리 마음엔 새로운 것들을 채울 공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