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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누의 서재 Sep 27. 2020

그리 간단치 않은 용서라는 행위에 대하여

서평 시리즈 #48 : <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용서에 대해 밝힌 생각이었다. 


그는 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만이 진정한 용서라고 말했을까?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용서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죄를 짓고 산다. 아니, 죄를 짓는다고 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일까. '죄'라 함은 도덕적인 비난을 넘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행위라고 가정한다면, 죄를 짓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잘못도 있겠지만 무거운 잘못도 있다. 어쩌면 그러한 잘못은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이는 용서를 받기도 한다.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은 용서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누가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행위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보다 용서란 무엇일까? 


대수롭지 않게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하면서 살아왔기에 '용서'라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생각이고 행동이었다. 


<조금 불편한 용서>는 이와 같은 용서의 의미를 3가지 질문을 통해 조명한다.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라는 어려운 질문을 통해서 말이다.  


읽을수록 쉽지 않은 책이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가 펼쳐지는 내용 자체도 어려웠지만 '용서'라는 행위에 얽힌 그 수많은 가치 판단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쉽사리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용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했다. '악'을 통해 '죄'를 생각해야 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저지른 '악' 중에서 '절대악'이라 불릴 수 있는 최악의 범죄,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자크 데리다, 한나 아렌트,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 등의 상반되는 생각들은 머리를 후끈하게 만들었다. 

악한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 용서라는 행위를 통해서 '원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읽기도 했다. 그렇다. 용서는 누구를 위함인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가해자는 용서를 구함으로써 자신을 짓누르던 죄의식을 덜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피해자는 '복수'와 '배상'을 포기하는 행위는 '용서'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피해자에게 용서는 어떤 의미에서, 행위의 완전성이 커질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피해가 최대화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에 가해자 또한 단순히 '용서'를 받는다고 하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단순히 자신이 '뉘우쳤다'는 것을 알리고 피해자와 '화해'를 한 것뿐이다. 용서로 이끌었던 그 행위, 즉 '죄'는 '죄 사함'이라는 것을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신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즉, 우리가 용서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처럼'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처럼 예전의 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자신의 딸을 총을 쏘아 죽이고 그 자신도 자살한 남학생의 과거와 배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릴 적부터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폭력적인 게임 등에 의존해 제대로 된 사회화를 경험하지 못한 한 남학생. 그는 어느 날, 평소와 같이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15명에게 아버지의 사냥용 총을 난사한다. 14명이 여성이었고 3명은 학생이 아닌 교생이었다. 니나의 어머니 기젤라 마이어는 누군가 전하는 '학교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때 이미 딸은 죽은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을 포함하여 16명의 생명을 앗아간 팀 크레취머를, 사건 발생 후 몇 개월이 훌쩍 지나서야 이해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범인의 이름조차 듣지 못했던 그녀가 팀 크레취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한다. 범인의 세상이 보였고 범인이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른 까닭에 대해 나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젤라 마이어는 결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이해를 하면 분명 무작정 감수해야 하는 것보다 견디는 것이 수월해진다고 한다. 허나 용서는 다른 차원의 의미이다. '용서'했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용서'와 '죄 사함'은 또 다른 의미라고 말한다. 용서란 이해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보일 수 있는 이 질문은 용서란 그리 간단치 않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무서운 질문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어려운 책이었다. 용서라는 행위를 관찰하기 위한 3가지 질문은 질문 하나하나마다 전과는 차원이 다른 심오한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2장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살인죄를 저지른 자신을 자신의 형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허나, 자신은 용서할 수 없다. 나 또한 돌이켜보면 추악한 일들을 어리다는 이유로, 몰랐다는 이유로, 괜찮을 거라는 이유로 저질러왔다고 생각한다. 나로 인해 눈물을 흘린 이들에게 사과를 한다면 그들은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나를 용서했을 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를 용서해도 되는 걸까? 용서란 어느 책이나 문구에서 쉽게 나오는 말처럼 그리 간단한 행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용서가 복잡한 일이라고 하여 용서를 구하는 일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계속 밝히듯이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선행되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상대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용서를 빌지 않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상대가 나를 용서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일이다. 다만, 그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은 사유를 통해 우리는 용서에 보다 진지한 태도를 지닐 수 있을 것이며 악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사유가 우리가 그러한 사유를 한 시점부터는 보다 '용서'를 구할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그다음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대의 행위일 것이다. 


흔히 뱉는 그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용서라는 행위, <조금 불편한 용서>였습니다. 




출처 : 

1) https://unsplash.com/photos/zeH-ljawHtg?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2) https://unsplash.com/photos/omwQmD0-N6c?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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