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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화영 Feb 21. 2021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볼 때마다 새로운 이유

애니메이션으로 미야자키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어느 블로그 글에서 그러더라.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볼 때마다 느끼는 게 달라져서 주기적으로 다시 챙겨 본다고. 볼 때마다 달라진다는 그 느낌은 뭘까?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늘 같은 장면에서 기존의 감동과 유사한 여운, 비슷한 양의 눈물을 흘리는 나는 궁금했다. 같은 작품에 따른 새로운 감상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다룬 책 <미야자키 월드>를 접하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최근 다시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블로그 주인의 말이 맞았다. 큰 감흥이 없던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기억에 없던 장면들이 새롭게 마음에 담겼다. 어떤 장면은 울지 않고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푹 빠져 보고 나면 긴 여운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때 보면 좋은 책이 <미야자키 월드>이다.

                                                                                                                                                               

수전 네이피어, <미야자키 월드>


이 책은 애니메이션 한 편 한 편을 미야자키 감독의 자취를 따라가며 긴요하게 해석한다. 그가 작품에서 장면과 캐릭터, 대사에 실은 의도들은 물론, 제작 과정, 제작 당시의 지브리가 놓인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눈에 보이듯 묘사하고 친절히 설명한다. 작품별로 챕터가 나뉘어 있어서 해당 작품을 보기 전이나 후에 한 챕터씩 읽기에 좋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다시 볼 때마다 이 책을 꺼내 함께 곁들여 읽으면 풍성한 해석으로 찐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한다.

                 

미야자키는 영화감독이자 애니메이션 거장이기 때문에 질책이 아닌 현실적이고 흥미로운 수단으로 젊은 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영화에서 훈계나 설교가 아닌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은 기적에 가깝다. 모험, 마법, 약간의 로맨스를 통해 온통 뒤죽박죽인 세상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그들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어둠을 초월할 가능성을 발견하게 했다.

수전 네이피어, <미야자키 월드>



미야자키의 작품 전반은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행동과 말로 용기, 수용, 기쁨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이야기에 녹인다. 그 조합이 너무 섬세했던 탓일까. 10대 때 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여느 날의 한 끼와 같이 평범했다. 귀한 음식을 앞에 두고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를 했던 것 같다. 재미있었지만, 재미있기'만' 했던 애니메이션. 그래서 꼭 다시 보겠다는 결심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치히로는 내가 기억하는 치히로에서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이었다. 불평 많고 평범한 열 살의 어린아이에서 시작해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돼지로 변한 부모를 되돌리기 위해 새로운 세계에서 고초를 겪는다. 투명해진 자신의 몸을 보고 절망하며 풀숲에 주저앉은 치히로는 하쿠의 도움으로 온천장에 들어가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치히로는 도움을 준 하쿠에게 자신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내보이며 용기 있게 행동한다. 음식과 온천장 종업원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며 난동을 피우는 가오나시에게는 엄마 아빠에게 주려고 했던 특별한 힘을 가진 마법의 경단을 먹인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가오나시를 무서워하거나 내치지 않고 자신의 곁에 두며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얌전히 굴어야 해." 하쿠를 살리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제니바에게 찾아가 용서를 대신 구하는 모습은 도입부에서 보여준 불만투성이의 소극적인 여자아이의 모습과 대조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보여준 소피의 모습 또한 극의 흐름에 따라 성장한다. 수동적이며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소피가 마녀의 저주로 백발노인이 되고부터 할머니의 마음가짐으로 행동하고 말한다. 하울에게 찾아가 자신이 청소부로 일하겠노라고 거침없이 말하는가 하면, 이상한 색으로 물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하울과 트러블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그를 다독인다. 자신의 의지를 용기 있게 말할 때면 주름 가득한 얼굴이 소녀의 얼굴로 돌아오는 신비로운 모습도 이 애니메이션의 매력 중 하나이다.


이렇듯 판타지 세계에서 아름다운 배경과 색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전개에 캐릭터의 성장곡선을 보여주는 디테일까지 즐길 수 있다. 여기에 감독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반전주의와 인내의 미학도 메시지로서 빼놓지 않는다.



 

아직 두 편 밖에 재감상을 못 했지만,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볼 때마다 새로운 이유는 미야자키 감독의 세계관이 그만큼 섬세하고 방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된 건 어린 시절에 겪은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동네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가족과 함께 트럭을 타고 빠져나오던 그때 한 여성이 아이를 안은 채 '태워달라'라고 했지만, 트럭은 멈추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안은 4살 아이가 자라서 일말의 죄책감, 즉 자신의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한 점에서 거장의 면모가 돋보인다. 결핍을 드러내고 인정할 때 비로소 완벽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난 후 느낀 게 많아서 파도가 이는 것처럼 마음이 일렁였는데, 글을 쓸 때는 그저 멍할 뿐이었다.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엮어야 할지 몰라 하얀 배경 안에 깜박이는 커서만 눈에 들어왔다. 이 벅차고도 감당이 되지 않는 마음을, 미야자키 감독은 작품을 했던 40년 내내 짊어진 채 살아왔을 것이다.



미야자키는 트라우마보다는 인내의 미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처를 지울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 다. 견디는 수밖에 없다. 치유할 방법은 없다.” 그는 감정의 상처가 “인간 존재의 기본 요소”이므로 “그저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전 네이피어, <미야자키 월드>


'살아야 한다.'라고 외쳤던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와 <바람이 분다>의 아야코처럼, 그는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삶을 여전히 감내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마지막 작품을 한창 준비 중이다. 이미 열네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용기, 수용, 기쁨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의 무거운 어깨는 조금 가벼워졌을까, 되레 무거울까.



*본 콘텐츠는 로크미디어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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