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화영 Sep 09. 2021

비정규직으로 6년을 일하고 깨달은 것

내가 정규직에 목숨 걸었던 이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울컥하더라.


나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절대 생고생을 돈 주고 사서 할 필요는 없다. 최저 시급이라도 받지 않으면, 고생은 피하자. 젊어서 고생에 익숙해졌다가 재수 없으면 평생 '투덜이 스머프'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고생이 아니라 좋은 경험을 해야 한다.

신영준, 주언규, <인생은 실전이다>


  파노라마처럼 나의 과거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봐도 내가 안쓰럽던 과거의 날들이었다.

 

  여러 방송국을 오가며 AD(조연출) 또는 FD(촬영현장 진행)로 6년을 일했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내신성적에 맞춰 정해 준 몇몇 대학교 중 별생각 없이 지방대 언론정보학부에 원서를 넣었고, 그걸 계기로 전공을 살리기 위해 첫 직장을 구했다.


  한 케이블 방송국에서 면접을 보려고 만난 PD는 나의 첫 사수가 되었다. 그가 한 이야기는 내가 방송국에서 일했던 내내 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6개월 계약직이고요. 최대 1년 11개월까지 일할 수 있어요."


  나는 계약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요즘 같이 취업이 어려울  아무 경력 없는 나를 채용해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렘  걱정 반으로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9  그날. 이제  직장을 구한 사회초년생의 가볍고도 무거운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곳에서 100만 원 내외의 월급을 받고 일을 했다. '그래도 어느 회사는 야근에 주말 출근을 해도 수당이 안 나온다던데, 여기는 야근하면 수당 나오니까 좋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지키지 않는 다른 회사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그나마 좋은 환경에서 일한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후 사수가 바뀌었고 그때부터 나는 적응을 못해 힘들어했다. 전 사수와 일하는 스타일이 너무 달랐다. 바뀐 사수는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알아서 내 일을 눈치껏 해야 했다. 직장생활 다 합쳐서 6개월 경력이 전부였던 나는 이 '눈치껏'이 너무나 어려워서 집에 가면 녹초가 되었고 다음 날 출근하는 게 두려워 새벽 늦게서야 잠에 들곤 했다.


  시간이 흘러 사수와의 문제도 사라지고 일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만큼의 경험을 쌓았다. 이제야 조금 편히 일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곧 계약 종료일이 다가왔다.

  일을 그만두던 날 그동안 정들었던 회사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아쉬운 마음에 펑펑 울었다. 인사를 받은 분들도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다른 데 가서도 잘 지내라고 말해주었다. 성실히, 그리고 우직하게 인정받으며 일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2년을 넘겨 일할 수 없었고 23개월 간의 첫 직장 생활이 끝났다.


중요한 영상파일을 백업해 둬야 해서 노트북과 외장 하드를 들고 회식 가던 길


  몇 년 후 공중파 방송사에서 일을 했다. 파견 계약직이었다.

  내가 들어간 팀은 어느 날 갑자기 FD가 잠수를 타는 바람에 일이 밀릴 대로 밀려 있었다. 면접 당일 밤 11시가 넘도록 면접 차림으로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바로 다음 날 녹화가 있었고, 곧 지방 공연 녹화도 여러 개가 잡힌 상황이라 두 달간 스파르타식으로 일을 배웠다. 이곳은 수당 지급이 안 되는 조건이었으므로 새벽까지 일하다 퇴근해도 내 돈 주고 택시비를 내서 집에 갔다. 가끔 부장님이 택시비를 쥐어 주며 집에 빨리 가라고 하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팀에 조인하자마자 다른 팀보다 두 배로 일을 했기 때문에 인정도 그만큼 빨리 받을 수 있었다. 팀 내 PD분들, 작가분들과도 점차 친해졌고 나도 자부심을 느끼며 힘들지만 즐겁게 일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2년 만에 종료됐다.


부장님이 주신 택시비... 막차가 있어서 타고 가라는 택시 안 타고 지하철을 타는 고집스러움...


  그렇게 6년 동안 4개의 방송사를 옮겨 다녔다. 계약이 끝나고 마지막 퇴근을 하던 날이면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난다. 이제 또 어디서 일을 하나. 당분간은 좀 쉴까? 적어도 월세 낼 돈, 생활비는 벌어야 하는데. 이 유목민 생활은 언제쯤이면 끝이 날까? 그런 생각들 말이다.


  비정규직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그리고 피치 못하게 늘 고민하곤 한다. 월급 이상으로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딱 월급만큼만 일할 것인가. 말하자면 비정규직은 상단이 닫혀 있다. 120% 능력 발휘를 한다고 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계약 조건이 사람을 계산적으로 만든다. 그래도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했다. 그러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주어진 일만 해야 했고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됐다. 비정규직 FD의 역할과 정규직 PD의 역할은 명확히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부러워했던 것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했다. 입사 때 찍은 증명사진이 박힌 내 이름의 사원증, 명함, 동기라고 부를 수 있는 동료가 있는 것, 명절마다 주는 선물세트. 정작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작고 소소한 것들이 비정규직인 나에게는 크게만 보였다.


  나이 서른을 넘기고 나서부터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사라져 갔다. 일을 잘했던 한 친구는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다른 분야로 떠났다. 외주 프로덕션에서 일하던 친구는 3개월치 월급이 밀렸고 결국 그 회사를 나왔다. 프리랜서 조연출 8년 차인 친구는 기약 없이 입봉(PD로서 첫 프로그램 연출을 맡는 것)을 기다리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진척 없이 계속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생활을 이어갔다.


"OO 씨, 이렇게 일하면 평생 FD밖에 못 해요."

"너는 편집 실력이 형편없어서 시집이나 가는 게 낫겠다."


  막막한 마음으로 6년을 일하면서 들었던 최악의 말이다. FD라고 하면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말을 놓는 내 또래의 감독님들이나 수당 못 받는 걸 뻔히 알면서도 본인이 할 일을 떠넘기고 홀연히 퇴근하는 PD,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비정규직임을 상기하게 만드는 말들이었다. 오래 두고 볼 사람이 아니니 잘 보일 필요도, 조심할 필요도 없다는 그 배려 없는 말투는 결국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을 쓰다 버리는 부속품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방송사에서 6년 간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깨달은 건 한 가지였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고,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정규직에 목숨을 걸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그때 마침 '상상스퀘어'의 채용 소식을 접했고 나는 무조건 이 회사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사지원서를 이를 갈며 썼고, 독서를 강조하는 회사라 생전 안 읽던 책을 눈에 불을 켜고 읽었다. 그리고 지금 상상스퀘어에서 3년째 PD로 일하고 있다.


  상상스퀘어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정규직 PD'라는 타이틀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그 타이틀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지낸다. 재택근무, 연차가 23일인 것보다 좋은 점은 상식이 통하는 곳이라는 것, 직원을 귀하게 여길 줄 안다는 것, 그리고 상단이 열려 있는 회사라는 것이다.


  방송국에서 6년 일한 것과 상상스퀘어에서 3년 일한 걸 비교하면 상상스퀘어에서 일하는 게 두세 배는 더 힘들다. 장점이 많은 만큼 빡센 곳이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하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사랑은 계좌다.' <인생은 실전이다> 저자이자 상상스퀘어의 의장인 신영준 박사님의  말은 결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알고 있다.  박사님의 쓰고 매운 조언은 고통스럽지만,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면 반드시 성장한다. 누가 'PD 문해력이 높아야 한다'라고 명확한 근거를 들어 조언해   있을까? 부모님도, 존경하는 선배도, 절친도 못할 조언이다. 어떤 대단한 프로듀서를 만나더라도 이런 깨달음은   없었을  같다.


  불안함과 고생에 익숙해져 한 곳에 머물러 있던 비정규직 FD는 평생 세상 탓을 하는 투덜이 스머프가 될 수도 있었다. 좋은 회사를 만나고, 좋은 멘토를 만나 하루하루 감사한 날들을 보내는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고 싶다.


  <인생은 실전이다>에는 신 박사님의 질 높은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나를 좋은 방향으로 변하게 해 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어서 분명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귀한 인사이트를 제공해 줄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지금의 운을 만나는데 6년이 걸렸다. 하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매일 불안함을 안은 채로 아침을 맞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빨리 운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이 책을 더 많이 추천해야 한다.


  취업준비생, 자영업자, N년차 직장인, 백수, 기업가 모두에게  도움을  책이다. <인생은 실전이다>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운을 만나게   조력자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본 콘텐츠는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다리를 두들겨 보지 않으면 망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