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약점은 가족이다. 부모님은 70대가 돼서도 일을 하셨다. 자식이 여섯이었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은 여러 차례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빚은 계속 늘었다. 맏딸, 맏아들인 언니와 큰오빠는 가계를 도와야 해서 스무 살 남짓부터 사회생활을 했다. 언니와 큰오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따로 살았기 때문에 자주 볼 수 없었다.
나는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언니를 동경했다. 언니는 예뻤다. 멋스러운 옷을 입었고, 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렸다. 언니는 한 달에 한 번 본가에 와서 이틀 정도 머물다가 자취하던 곳으로 떠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언니는 나와 막냇동생을 데리고 극장에 데려가서 만화영화를 보여줬다. 책 대여점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줬다. 어떤 날은 옷을 사주었다.
엄마가 잘 몰라서 챙겨주지 못한 세세한 것들은 언니가 살펴줬다. 첫 월경을 겪고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했던 나는 언니의 따뜻한 말에 금세 마음이 놓였다. 언니는 나에게 축하한다고 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고 했다. 말주변이 없어 쭈뼛거리기만 했던 나를 알아주는 언니가 좋았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읽는 언니가 신기했다. 언니처럼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열두 살 정도 됐을 때 언니의 일기를 몰래 읽은 적이 있다. 가난이 죽도록 싫다는 내용이었다. 가난은 죄라고도 적혀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그 일기를 보고 난 후부터 언니가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언니가 웃는 걸 봐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언니의 진짜 속마음은 어떨까? 어른이 되면 진짜 감정을 숨기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롤모델이었던 언니를 어린 소녀로 보게 된 순간이었다.
우러러보던 언니의 당시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20대 중반의 꿈 많고 꽃 같은 여자. 그게 그때의 언니였다.
언니는 이제 다 늙어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하는 50대 초반의 아줌마가 되었다.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는 언니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치킨이나 시켜 드시라고 기프티콘을 보내는 나도 언니와 똑같이 아줌마가 되었다. 드디어 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짬바(?)가 됐다.
언니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내가 마흔이 넘었을 때 건방을 떨며 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언니의 20대를 돌려줄 순 없지만, 남은 인생 후회 없이 즐기면서 살게 해 주겠다고. 서울에 몇십 억 되는 집을 사줄 순 없지만,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행복을 자주 느끼게 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각서다. 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딸 같은 동생의 굳은 의지가 담긴 편지일 수도 있겠다.
나의 최대 약점은 가족이다. 가장 여리고 말랑한 부위. 그래서 반드시 단단해져야 한다. 지키고 보살펴야만 한다. 20대에 가난을 미워하면서도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던 언니가 그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