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찜‧해물전‧전골이 좋은 ‘마포나루’...탕수육‧군만두 강자 ‘명화원’
하늘이 끄물끄물하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연일 뿌리는 요즘이다. 최근 들어 ‘가을장마’란 생소한 단어가 들린다. ‘기후변화’는 말 그대로 기후의 변화지만 일상에 쓰이는 단어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한반도 기후가 아열대로 변하고 있단 소리가 있었는데, 이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소나기 대신 스콜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쓰이고 여름 진객이던 장마가 이젠 가을 단골손님으로 변신하고 있다. 제주도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림연구소는 일찌감치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로 이름과 기능을 바꿔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을비가 잦은 요즘이다.
도로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리면 음식을 사랑하는 진객의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비 오는 날은 막걸리와 파전’이란 등식 때문이다. 이 완벽한(?) 수학공식이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느 누구도 거역 못하는 절대 진리로 자리 잡았다.
하늘이 무채색 수묵화처럼 변하고 구름이 무거워지면서 빗방울 한 두 개가 콧등을 간질이면 표면적으론 ‘식객’, 실제론 ‘주객’들은 스며들어 잔 맞댈 곳을 찾기 시작한다. 때 마침 먹구름이 무겁게 깔린 그날을 마포에서 맞닥트렸다. 사회에서 인연이 된 신문사 선배들과 번개다.
때가 때인지라 많이 모이지도 못하고 또 많이 마시지도 못할 때다. 해서 적당히 젖을 곳을 모색하다 보니 ‘마포나루’가 당첨됐다. 오래전부터 신문쟁이들의 출입이 잦았던 곳이다. 신문쟁이들이 오갔다는 것은 엉덩이 깔고 질펀하기 먹기 좋은 곳이란 의미도 있지만 맛이 보장된 곳이란 ‘훈장’도 있는 곳이다.
이번 칼럼에 소개할 한식당 ‘마포나루’는 실제 옛 마포나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옛 마포나루는 ‘한양도성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던 나루다. 일명 삼개나루라 불렀다. 마(麻)의 음이 ‘삼’이기 때문에 그리 불렀다.
지금의 마포대교 북쪽 방면 반대쪽의 여의도는 예전엔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이었다. 한강 상류에서 쓸려내려온 모래가 켜켜이 쌓인 곳이다. 백사장을 지나면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당시를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나루터에는 주로 상선들이 운집했다. 배는 나룻배, 주로 사선(私船)이 대부분이다.
예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새우젓장사’라는 명칭이 고유명사처럼 쓰였고 오늘날도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 한강은 조정의 재정을 지탱하는 세곡 운송로 역할에 무게가 실렸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국가재정 수입은 거의 농업생산물에 의지했다. 사회 자체가 농업경제를 기반했기 때문에 현물을 조세로 걷어 들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늘 세곡 운송에 관심을 가졌다. 육지를 통한 운송보다는 대량수송이 용이한 조운을 통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한강을 통한 조운은 더욱 중요해졌다. 대동미를 실은 세곡선과 강서구에 있는 증미산은 관련이 있다.
지금은 증미(曾米)란 지명을 쓰지만 원래는 증미(拯米)다. 과거 증미산 앞 한강 유역은 폭이 좁고 물살이 세서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침몰한 조운선에서 쌀(米)을 건져(拯) 올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강서구 염창동은 소금(鹽) 창고(倉)가 있던 곳으로 이 역시 마포로 옮겨져 새우젓을 만들 때 쓰이거나 소금길을 통해 도성으로 운반돼 팔렸다.
한강의 다리가 생긴 곳은 과거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마포나루가 있던 곳에는 마포대교를 비롯해 광나루엔 광진교와 천호대교, 삼밭나루에는 잠실대교, 뚝섬나루에는 영동대교, 두모포에는 동호대교, 입석포에는 성수대교, 한강나루에는 한남대교, 서빙고나루에는 반포대교, 동작나루에는 동작대교, 혹석진에는 한강대교, 노량진에는 한강철교, 용산진에는 원효대교, 서강나루에는 서강대교, 양화나루에는 양화대교와 성산대교, 공암나루에는 행주대교가 각각 가설됐다.
마포대교 북단 마포나루 일대는 과거 경강상인들이 상권을 잡았던 곳이다. 그래서 상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다. 외식업이 차고 넘치는 이유도 과거에 이미 상권이 형성된 탓이다. ‘밥을 잊은 그대에게’란 재미난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한식당 ‘마포나루’는 상호대로 마포나루 인근 도화동에서 1991년 개업해 업력 31년 차를 맞는 곳이다. ‘마포나루’ 도화본점과 직영점 아크로점(2007년 개업)을 운영한다. 두 점포는 불과 250m 떨어져 있는 마포나루의 터줏대감이다.
“옛 정취와 풍류를 이어받아 세월로 깊어진 손맛으로 바쁜 일상을 잠시라도 잊게 해 주며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하루하루를 민화처럼 그려내는 곳, 그렇게 마포나루는 3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이제는 그 시간을 발판 삼아 더욱 깊고 정겨운 백년가게 마포나루를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마포나루’의 다짐이다. 한 세대를 너끈히 견뎌 온 업력답게 옛 정취와 풍류를 살리는 손맛을 지향한다. ‘마포나루’가 미는 대표 음식은 닭찜, 해물파전, 한방갈비찜이다. 닭찜은 ‘국내 최초 원조 닭찜의 맛’이라고 자랑한다. 국물이 자작하고 매콤 달콤한 것이 특징이다. 전골과 전(煎)요리, 볶음요리 등 모든 요리의 신선도를 위해 미리 만들어놓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조리한다고 자랑한다.
세발 낙지 전골은 풍성한 속 재료가 주인의 인심을 대변한다. 전골 육수의 칼칼함과 시원함에 목젖이 웃는다. 살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나루주에 모둠전은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밖의 날씨와 잘 어울린다. 낙지비빔밥, 불고기비빔밥 등 비빔밥 종류도 맛의 디테일이 살아있다. 마포나루의 장점은 우리 전통의 맛을 살린 토속음식을 주력으로 푸짐하게 제공된다는 것이다.
용산진이 있던 원효대교 북단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다 보면 삼각지가 나온다. 이곳에는 3대 가업을 잇는 화상(華商) 중국음식점 ‘명화원’이 있다. ‘명화원’은 한 곳에서 65년을 버틴 노포 중 노포다.
한국 화교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원래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이들이지만 후일 본의 아니게 대만국적을 갖게 된다. 화상이 처음 우리나라에 발을 디딘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일 일어나면서 조정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면서부터가 시작이다.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하려 한 청은 ‘이때다’하면서 군대를 파견한다. 이때 동행한 군역상인 40여 명이 한국 화교의 기원이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을 기점으로 이후에는 산동성 출신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산동인 중심의 화교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화교 차별정책으로 이들은 큰 상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대부분 조그만 중국음식점으로 가계를 이어나갔다. 어쩌면 ‘명화원’ 1대 창업주 역시 같은 길을 걸었지 않았을까 한다.
명화원은 과거에는 비교적 큰 매장이었다고 한다. 한강로가 확장되면서 건물의 앞부분이 뭉텅 잘려서 지금의 인도가 됐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과거 주방 자리다. 그 주방 자리를 다시 주방과 홀로 나누자니 지금처럼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명화원이 한창 잘 나갈 때는 가게 앞에 대기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이는 손님도 많았지만 테이블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최근 ‘명화원’을 찾은 날도 비가 한 두 방울 콧등을 때릴 때였다. 사무실로 되돌아가 우산을 가져올까 하다가 요행을 바라면서 횡당보도를 건너 오전 11시 일찌감치 ‘명화원’으로 스며들었다. ‘명화원’의 시그니처 메뉴는 탕수육과 군만두다. 이날 다른 테이블을 지켜본 결과 대부분이 탕수육과 군만두를 기본으로 주문하고 짜장면이나 짬뽕으로 마무리를 했다. 이들 외에 ‘명화원’ 메뉴는 물만두까지 딱 5종이다.
필자는 지인과 2명이 가서 5종 메뉴를 모두 맛봤다. 이유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우산을 안 가져온 것이 과식을 유발하게 될 줄이야. 첫 주문을 넣은 탕수육이 한참 뒤에 나왔다. 새로 튀기느라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 맛은 예나 지금이나 명불허전이다. 쫄깃한 찹쌀 옷과 간이 적당한 소스가 장점이다.
두 번째로 나온 군만두 역시 ‘명화원’의 주력 메뉴답다. 좋은 가성비가 군만두 주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짜장면과 짬뽕은 평범했고 물만두는 다소 염도가 있어서 간장 없이 그냥 먹어야 했다. 과거에는 오후 3시경이면 문을 닫고 다음날 쓸 만두를 빚었는데, 요즘은 오전 11시에 문을 열어 오후 3~5시 브레이크 타임을 갖고 8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한다.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쉰다. 필자도 얼마 전 월요일에 헛걸음을 한 적이 있어서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