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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자락에 숨은 놀라운 숙성회 창작요리 식당

간판도 없이 물고기 네온사인만 달랑...단골손님만 찾는 '구르메'  

제법 겨울다운 날씨다. 칼바람이 옷섶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날, 선배의 호출이 왔다. 바쁜 일로 옴짝달싹 못하고 하루 종일 서류와 씨름하고 있는데 선배의 호출은 심리적 갈등을 유발했다. 호출을 거절하면 서류 몇 장 더 만들 수는 있었지만 이번에 모이는 장소가 제법 솔깃했다. 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데 겨울바람이 생각 외로 꽤나 매웠다.      


약속 장소인 종로구 평창동으로 오르기 위해 서울신문사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정류장에는 퇴근시간대라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전에는 허연 입김을 뿜어내는 겨울 풍경이었겠지만 마스크 때문에 그런 일상적 풍경마저 사라진 지 오래다. 사소한 풍경마저 절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서려는 순간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버스가 경복궁의 서쪽 자하문로에 들어섰다. 이 도로는 과거 백운동천이란 제법 큰 물줄기가 흘렀던 곳이다. 도로 복개로 보이지 않을 뿐 지금도 도로 밑으로는 물길이 있다. 백운동천은 인왕산 골짜기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줄기다.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어떤 물줄기보다 가장 길어서 청계천의 본류로 불린다. 백운동천이란 명칭은 발원한 물줄기가 상류지역인 백운동을 감싸고돌아 흘러 내려왔기 때문에 붙여졌다.     


창의문 입구에는 ‘청계천 발원’를 나타내는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發源地)로 정하였다’고 적혀 있다. 버스는 백운동천을 거슬러 올라 발원지 표석이 서 있는 창의문 쪽이 아닌 자하문 터널을 통해 부암동을 거쳐 평창동으로 향했다.       


선혜청 평창이 있던 땅 평창동

     

탕춘대성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평창동 전경[사진=서울역사편찬원]

평창동이라 지명은 1914년 동명 제정 시 이곳에 있었던 선혜청의 곡물창고 평창(平倉)에서 유래됐다. 조선 태조는 재위 5년(1396) 차에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나눴다. 이때 지금의 평창동은 북부 의통방 선혜청계 지역이었다. 고종 때는 북부 상평방 선혜청계 지역에 속했다. 1894년 갑오개혁과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1936년 큰 폭의 관할구역 변경, 1943년 구(區) 제도 시행 등으로 소속이 이리저리 바뀌었다가 해방 후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에 의해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꿀 때 평창리가 됐다. 이후 1950년 서울시조례로 평창리는 평창동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종로구지만 1975년까지 서대문구 소속이었었다.      


삼각산 보현봉에서 서남쪽 산 능선을 따라 평창동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크고 작은 산봉우리 2개가 연이어 있는데 이를 형제봉이라 한다. 도둑굴은 평창동에 있던 골짜기로써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었는데 산이 깊고 으슥해 도둑이 많아서 유래된 이름이다.      


삼각산 남쪽 기슭에 해당되는 평창동 쪽에 있는 많은 골짜기는 한때 사이비 종교인들이 득실댔다고 한다. 삼각산 산신령의 영험함을 받았다는 사이비 교주들이 골짜기 곳곳에 토굴을 파거나 암자를 짓고 북과 꽹과리를 치며 밤낮없이 굿을 했다. 그러나 불교정화운동, 북악터널 개통 등을 이유로 단속이 강화되면서 암자나 굿 행위가 사라졌다.       


불교정화운동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벌어진 불교 내 자정운동이다. 이 운동의 직접적 계기는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전통 사찰에서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다. 대처승은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달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키면서 나타난 파행이다. 이 운동은 비구승과 대처승 양측 간의 심각한 대립을 촉발했고 결국 조계종에서 태고종이 분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한국불교사에서 정통실천(계율)의 해석의 차이로 생겨난 최초의 승단 분열로 기록된다.      


평창동 미술거리 간판 가나아트센터     

프랑스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설계한 평창동 가나아트센터는 미술거리의 간판 같은 곳이다.[사진=종로구청]

지금의 평창동은 이런 무속과는 거리가 먼 ‘부촌’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산 중턱에 형성된 주거지는 좋은 공기와 남향 배치로 인해 부유층 주거지로 부상했고 고급빌라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 동네는 볼거리도 많아 탐방 코스로도 유명하다. 이름 하여 ‘한 폭의 그림 속 풍경길 평창동’이다. 답사지는 연화정사, 김종영 미술관, 토탈미술관, 가나아트센터, 키미 미술관, 영인문학관, 보현산신각, 박종화 가옥, 평창 터, 별기군 훈련소 터다.  

    

순방향, 역방향 관계없다. 다만 연화정사부터 시작해 별기군 훈련소 터로 향하는 것이 내리막길이다. 이곳의 탐방 포인트는 연화정사에서 바라보는 한 폭의 그림 속 풍경 ‘평창동 전원주택 단지’, 가나아트센터, 토탈미술관, 김종영미술관 등 미술관 순례, 문인들의 자취 따라 걷는 문학 산책로 박종화 가옥, 영인문학관 등이다. 

    

평창동에는 1980년대부터 미술관과 화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유명 작가들도 이주하면서 자연스레 미술거리를 만들었다. 미술관으로는 1992년 토탈미술관이 개관한 데 이어 이응노미술관, 김흥수미술관이 연이어 들어섰다. 화랑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가나아트센터가 1998년에 평창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평창동 일대 미술거리를 견인했다. 화랑과 함께 화랑 운영자들도 평창동에 똬리를 틀었고 일대에 사는 미술인만 해도 줄잡아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갤러리 중에서 특히 가나아트센터는 외관부터 볼만하다. 프랑스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설계했다. 그는 인사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와 양주시 장흥에 있는 가나아트파크도 관여한 ‘가나아트 전문 건축가’다. 그의 건축은 정확한 라인, 안정적인 부피, 섬세한 조명으로 대표된다. 무엇보다 그의 미학은 고객과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것이다. 건물은 크게 전시. 판매. 업무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세 공간 사이는 중정으로 꾸며 야외극장과 조각정원을 겸하게 하는 등 건축물 자체가 미술품에 버금간다. 야외공연장, 아카데미홀, 공예관, 두레유 등의 부대시설이 있다. 건축가의 건축 의도를 알면 공간의 새로운 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방은 1층 식탁은 지하 구조도 재미

심희수 오너 셰프의 숙성회 창작요리 전문점 ‘구르메’는 사실상 의미 없는 상호다. 간판이 없기 때문이다. 평창동 섬진강장어집 좌측에 붙은 식당은 주방이 1층, 식탁은 지하에 있다.

모바일 폰을 만지작거리며 평창동에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보는 사이에 버스는 어느새 북악터널 가까이 접어들고 있었다. 평창동 108번지, 버스정류장 명으로는 벽산평창힐스아파트에서 하차하면 거대한 섬진장민물장어집 간판이 보인다. 이 식당 때문에 ‘구르메’를 찾을 수 있지 만약 따로 있었다면 쉽지 않은 외형이다. ‘구르메’는 이번 칼럼에 소개할 식당인데, 일단 간판이 없다. 그리 크지 않은 블루칼라의 물고기 모양 네온사인이 달랑 달려있을 뿐이다. 미술거리 한가운데 위치해선지 뭔가 예술적이다. 그러나 첫 방문객들에겐 불편하단 볼멘소리 듣기 딱 좋은 모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한 번 당황스럽다. 주방이 눈앞에 펼쳐지고 주방에서 열심히 뭔가를 만드는 심희수 오너 셰프가 반갑게 맞이하기 때문이다. 주방은 마치 실험실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복잡하다. 사방에 펼쳐진 나무 도마와 냄비들. 도마 위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횟감. 한쪽 벽을 가득 재우고 있는 사케, 백주, 양주 등 주류들.              

   

주방 한쪽 개수대 위쪽엔 청어 몇 마리가 과메기로 변신하고 있고 그 뒤로는 대물 가자미와 아구가 함께 매달려 건조되고 있다.


주방 한쪽 개수대 위쪽엔 청어 몇 마리가 기름을 빼면서 과메기로 변신하고 있다. 그 옆에는 대물 가자미와 아구가 함께 매달려 ‘쫀득쫀득해 지자’고 결의를 다지고 있는 풍경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식당 주방과는 사뭇 달랐다. 지하로 들어서니 4인 테이블 5개 정도가 놓여 있다. 한쪽에는 잠수복이 걸려 있다. 심 셰프가 다이빙이 치미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 실내장식이다. 이목을, 구스타프 클림프의 프린팅과 심지어 신 셰프 자신의 그림까지 걸려 있다. 신 셰프는 평창동 토박이다. 미술거리 사는 주민답다.         


그이 요리는 변칙이다. 표준 레시피에 익숙한 식객에게는 파격적이다. 그러나 한쪽으로 생각하면 매우 실험적인 요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심 셰프 자신은 ‘창작요리’라고 규정했다. 그러고 보니 그 표현이 적절하다. 실험적인 시간을 거쳐 만든 자신만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의외로 내공이 느껴지는 각종 요리들이 오마카세로 제공된다. 1인당 3만5000원~10만원까지 코스가 준비돼 있다. 이날은 미들급 가격대로 제공됐는데 요리 하나하나가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해산물은 직접 하남에 있는 산지 직매인들을 통해 구매한다. 실하고 좋은 것 한 마리를 고르기 위해 수족관 앞에서 하염없이 뚫어지게 쳐다보기가 일수다. 홍합탕과 애피타이저 샐러드가 먼저 제공됐다. 양배추에 표고버섯, 오리를 슬라이스 쳐서 새콤한 소스에 참깨를 듬뿍 친 것이 엉성해 보여도 건강한 맛이 났다. 소금, 소스 등도 죄다 직접 만든다고 한다. 피문어 피클, 청어알 요리, 숭어내장젓갈 등이 초반 테이블을 채웠다. 뒤이어 감성돔이 나왔다. 이곳에선 플레이팅이란 단어가 사치다. 맨 접시에 오직 횟감만 채워진다. 그러기에 두툼한 회가 더욱 커 보인다. 돔 껍질은 마스카와 대신 히비키를 했다. 돔의 지방을 녹여서 더욱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한 것인데, 숙성회라서 이미 고소한 감칠맛을 극에 달해 있다.   

   

<사진5>사진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감성돔, 방어, 청어회, 청어과메기.

방어가 부위별로 한 접시 담겨 나왔다. 기름지다 못해 씹을 때마다 기름이 콸콸 쏟아지는 느낌이다. 청어알 찜은 양파와 함께 씹으면 식감이 남다르면서 달짝지근한 맛에 혀의 미뢰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청어 사시미는 파와 양념을 살짝 뒤지어 쓰고 나오는데, 숙성회로 맛이 우리가 흔히 접했던 횟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잘 삶긴 꼬막에는 스토리가 있다. 꼬막 삶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남 벌교까지 가서 이틀간 큰 비용을 들여 사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꼬막이 기막히게 잘 삶겼다.     


마지막 코스로 연타석 홈런을 친 것은 청어 과메기와 대물 가자미 찜이다. 청어 과메기는 흔히 먹던 거무튀튀한 색이 아니라 붉은빛이 돌았다. 주방 위에 매달려서 기름을 빼던 그 청어였다. 약간 비릴 줄 알았던 예단은 곱창김에 싸서 한 점 입에 넣는 순간 한방에 날라 갔다. 그러고 보니 이 식당서 제공된 횟감이나 요리 중 비린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북한산 자락 숙성 회 창작요리에 깜짝 놀란 하루다. 이곳에서만 14년 차, 외식경력 17년 차 셰프의 숨은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간판이 없어도 괜찮은 이유는 바로 이 내공에 매료된 단골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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