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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고기 설렁탕과 곰탕

2대 가업 ‘외고집설렁탕’ㆍ프랜차이즈 ‘이도곰탕’

장모 손맛 이어 2대째 가업 ‘외고집설렁탕’

정원 넓은 계동 주택가 맑은 탕 ‘이도곰탕’     


흔히들 ‘물에 빠진 고기는 안 먹는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에는 고기는 직화에 구워 먹어야 제 맛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실상은 직화 구이만큼 물에 빠진 고기, 즉 수육 문화도 발단된 것이 우리 요리다.            


우리 민족은 맥족(貊族)의 후예답게 육류를 즐겨 먹었다. 맥은 예(濊)로도 불러 흔히들 둘을 합쳐 예맥족이라고 했다. 엄밀히 따지면 예와 맥은 사회·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 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예족은 호랑이, 맥족은 곰을 토템으로 섬겼는데,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이 이들을 평정하고 복속시켜 고조선이란 종족 집단을 이뤘다는 것이 단군신화 골자다.       


예맥족 후예답게 육식 문화 발달한 한민족     


예맥족을 논하려면 역사를 까마득하게 거슬러 올라 기원전 2~3세기까지 가야 한다. 예맥족은 이 무렵 쑹화강, 압록강 유역과 동해안 일대(한반도의 평안도·함경도·강원도, 중국의 랴오닝성과 지린성)에 걸쳐 정착하며 활동했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을 이루는 족속들에 예맥이 어김없이 들어가 있다. 부여에서 갈래로 뻗어 나와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 역시 포함시킬 수 있다.      


부여는 중국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왔고 이들에게서 고구려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계루부 왕실)이 나왔다. 주몽 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라 불리는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이들 중 일부(비류·온조 집단)가 다시 남하해 한강 유역에 백제를 세웠다. 따라서 고구려 역시 부여의 갈래로 볼 수 있다. 물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어 정설은 없으나 우리 민족의 연원에 관여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삼국·고려전기 불교 영향 육식 쇠퇴      


예맥족은 유목계 민족으로 사냥과 유목생활을 주로 했다. 따라서 고기가 주식이었고 이를 다루는 솜씨가 발달했다. 육식 남발로 공급원 부족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 영향으로 육류 섭취가 원활하지 않았다. 고려 전기는 육식 문화가 위축되면서 주로 생채를 밥에 싸서 먹는 쌈 채소 음식이 유행했다. 이 시기는 연회에서 육식을 절제하고 이를 대체하는 달콤한 기호식품이 발달했다. 육류는 태묘제, 산천제, 성황제 같은 제사의 제물로 사용됐다. 공식적으로 음복을 했지만 왕이 제사에서 육류를 먹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고려 말에는 원(元)의 영향으로 육식이 복원됐다. 원나라는 1271년(원종)부터 1368년(공민왕)까지 100년 가까이 고려를 지배했다. 몽골 문화 유입으로 인해 고려 후기에는 육식 문화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고려의 발달된 목축 기술은 소의 사육 두수를 증가시켜 육식 문화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여기에 소의 이마를 타격하는 도축법이 원나라로부터 전해지면서 고기의 풍미를 증가시켰다. 고려인의 육식은 소를 농우에서 식우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때 형성된 고려 음식은 오늘날 우리 음식 문화의 근간이 됐다. 물에 빠진 고기 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때부터다.       


고려 후기 부활…조선 우금으로 제한       


조선시대 들어 소고기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졌지만 우금(牛禁) 정책 때문에 드러내 놓고 소비하진 못했다. 우금은 농업국가인 조선이 권농과 농산물 생산 차질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실시한 불법 소도살 금지령이다. 소는 농본 국가 조선의 존재 근간이었다. 1398년(태조7)에 첫  우금령을 내린 이후 역대 국왕들은 횟수와 체감도에서 차이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우금정책을 폈다.      


우금을 위반하고 자기 소를 도살한 자, 남의 소를 사서 도살한 자, 남의 소를 훔쳐 도살한 자 순으로 점점 형량이 무거웠다. 특히 남의 소를 훔쳐 도살한 자는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 같은 강력한 조치는 농본 사회에서 소가 차지하는 위상을 대변한다.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소는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역할을 했다. 

  

소는 쟁기질 노동력의 원천이었고 소출이 줄면 농민의 농업 이탈이 증가했다. 이는 농촌 사회의 불안과 붕괴로 이어지고 세수에 영향을 끼쳐 국가 재정을 위협했다. 결국 소 한 마리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소의 안정적인 확보를 통한 농업 생산성 유지를 위해 우금정책을 폈다. 조선시대에는 우금과 함께 소나무 남획을 막기 위해 이의 벌채를 금지하는 송금(松禁), 쌀로 술 빚는 것을 금하는 주금(酒禁) 등 삼금 정책을 폈다.      


조선시대 현방서 거래 합법화      


하지만 오랜 식습관으로 인해 육식의 완전한 금지는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나라서 지정한 현방(懸房)에서 소를 도축하고 팔았다. 현방은 성균관 노비였던 반인(泮人)에게 독점권을 줬다. 현방에서 소를 도축하는 것을 공도(公屠)라고 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밀도살이고 법으로 막은 것이 우금이다. 암행어사의 주된 단속 항목 중 하나로 불법적인 소 도축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우금정책은 조선후기부터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농사에 쓰이는 소에 대한 불법적인 도살을 단속해야 할 감사나 수령이 근무에 태만하거나 아예 이와 관련해 부정부패를 벌였기 때문이다. 일본과 소가죽 교역이 늘면서 이에 대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사설 도축장이 늘어났다. 양반들 중심으로 이뤄지던 소고기 소비가 경제력이 강화된 중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소의 도축도 함께 늘었다.        


구이와 함께 발달한 고기 국물 요리 

고기 국물 요리는 서민들을 위해 발달했다. 한 손님이 주막집서 국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운 듯한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화첩 중 ‘주막’.

국은 탕반 식문화가 발달된 우리 상의 주연이다. 이는 채소로 끓인 국이 몽골 문화가 유입되면서 고깃국으로 서서히 변했다. 몽골은 기후 때문에 맹물에 고기와 뼈를 넣고 푹 삶는 국물 음식이 발달했다. 우리 대표적 고기국인 곰탕과 설렁탕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문헌상 고려 전기에는 없던 조리 방식으로 볼 때 원나라 영향을 받은 요리법이란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는 난로회(煖爐會)란 소고기 먹는 모임이 유행했다. 이 또한 중국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늦어도 17세기 후반에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가 없던 서민들은 소고기 구이는 언감생심이었다. 대신 값싼 내장 등 부산물을 이용해 국이나 탕을 끓여 먹었다. 조선말에는 소의 모든 부위를 물에 ‘빠트려’ 한 그릇에 말아먹는 국밥문화가 유행했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식문화가 발달했다. 재료에 따라 내장으로 만든 국에는 양탕, 살코기와 내장으로 만든 육개장, 뼈가 붙은 고기로 만든 족탕, 꼬리탕, 살코기만 넣은 소고깃국으로 나뉘었다. 그중에서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운 것은 설렁탕이었다. 설렁탕의 인기 비결은 소고기, 탕반 문화에 익숙한 우리 식문화 취향을 저격했기 때문이다.      


설렁탕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사이 서울 전역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서울 대표 음식으로 발전했다. 사대문 안에는 1904년 문을 열어 100년이 훌쩍 넘은 이문설렁탕, 70년이 넘은 잼배옥, 문화옥, 사대문 밖에서는 옥천옥과 무수옥 등이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모 손맛 이은 고집스런 외길

    

지난 2005년 장모에게 전수받은 조리법을 개선한 설렁탕 레시피를 선보인 ‘외고집설렁탕’의 설렁탕.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외고집설렁탕’은 상호에 결연한 의지를 담아 고집스럽게 국물을 만들어 왔다. 현 대표가 장모에게 전수받은 조리법을 개선한 설렁탕 레시피를 선보이고 있다. 횡성한우를 사용한 설렁탕에다가 국산 무, 배추, 고춧가루, 천일염 등으로 만든 김치로 유명하다.     

 

이곳은 설렁탕과 수육, 그리고 육개장에 사용하는 소고기를 직접 선별할 만큼 좋은 식재료만을 고집하는 대표의 마음이 기본에 충실한 이곳 음식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아울러 편안한 한국식 밥집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단출하지만 정성 가득한 설렁탕 맛을 이어간다는 평이 이어지는 곳이다. 설렁탕은 뽀얀 국물에 파와 소금을 넣고 소면과 함께 말아먹기도 하는데 소설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도 앓아누운 아내가 먹고 싶은 음식으로 등장할 정도로 대중적이다.   

   

널찍한 마당·깔끔한 인테리어 자랑  

'이도곰탕’의 곰탕과 수육.

최근 길거리에서 눈에 자주 띄는 곰탕 간판이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본점을 둔 ‘이도곰탕’이다. 프랜차이즈에는 발길을 잘 안 하지만 약속 때문에 계동에 있는 직영점을 찾은 적이 있다. 널찍한 마당을 가진 양옥건물에 깔끔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곳이다.   


설렁탕 국물은 담백하고 가벼우며 색깔이 뽀얀 반면 곰탕 국물은 진하고 무거우며 색깔이 약간 노릇하다. ‘이도곰탕’은 한우곰탕 전문점으로 세종대왕 18대 후손인 한의사가 만든 비법으로 3대째 이어지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필자가 대한한의사협회 출입기자를 꽤 오래 했지만 그런 풍문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선지 그 한의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원고 마감부터 시켜야겠다.      


식당 측은 “시원하고 깔끔하면서도 깊이 있는 육수의 곰탕이 인기메뉴”라며 “싱싱한 부추 아래 1등급 한우의 우설, 눈두덩, 볼살이 들어있는 수육과 수육 후에 추가로 먹을 수 있는 장국수 장죽도 별미”라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조 이익의 ‘성호사설’(권 25)에서는 ‘조석으로 밥과 갱, 고기 하나, 채소 하나를 먹는다’했고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국은 밥 다음이요 반찬에 으뜸이라 국이 없으면 얼굴에 눈이 없는 것 같은 고로 온갖 잔치에 국 없으면 못쓴다’라고 할 정도로 우리네 밥상에서 국물은 필수였기에 탕반요리의 대중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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