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다슬기해장국‘ㆍ‘둔내민속촌’
이달 음력 보름 주말에 KTX 강릉선에 몸을 실었다. 지난 9월 묵호행에 이어 두 번째 기차여행이다. 이번 여정은 오래전 92세 노모를 모시고 가족 여행을 위해 강원도 횡성군 둔내에 있는 웰리힐리파크를 2박3일 예약해둔 터였다. 결과적으로 노모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모시진 못했고 대신 큰 아들과 약속을 잡았다.
웰리힐리파크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에 위치한 사계절 종합 리조트다. 1995년 12월 개장 당시는 성우리조트란 이름이었다. 리조트는 2011년 5월 신안그룹에 인수된 후 2012년에 웰리힐리파크로 브랜드를 변경했다. 리조트의 새로운 이름은 Well(좋음), Hill(자연), Healing(치유)을 결합시켜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의미를 담았다.
주인이 바뀐 후 대규모 투자와 함께 시설 개선 작업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스키 슬로프, 호텔, 워터파크, 키즈파크 등 시설이 추가됐다. 리조트는 특히 스키와 스노보드에 최적화된 시설을 갖추고 있어 겨울에 호황을 누린다. 대형 워터파크로 여름 시장 공백도 메우고 있다. KTX 둔내역과 제2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방문객이 많아지는 추세다.
한편 KTX 강릉선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2017년 12월에 개통됐다. 기존 경강선(경기도 여주-강원도 강릉)의 일부로 서울-청량리-강릉 구간을 약 2시간 내로 연결해 전에 없이 두 지역을 빠르게 이어준다.
동해의 대표적 해안도시 강릉은 물론 노선이 지나는 횡성, 둔내, 평창, 정동진, 묵호 등 강원도 주요 도시를 관광지로 변모시켰다. 일일생활권으로 묶이면서 당일치기 관광이 가능하게 됐다. 이는 낙후된 지방 소도시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었고 인구 유입을 가져왔다. 이번 여정에서 운 좋게 날이 맞아 방문했던 횡성 5일장 역시 지역민은 물론 수도권 관광객이 뒤섞여 활기를 띠었다.
횡성 5일장은 상설 전통시장인 횡성시장에서 매 1·6일이 들어가는 날에 열리는 5일장이다. 횡성시장은 기록에 따르면 동대문 밖에서 제일가는 장이라 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19년 4월1일 횡성장날을 기해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을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횡성군청 뒷동산에는 이를 기념하는 ‘三一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서울서 고속열차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라 당일치기 장구경과 장보기에 좋은 곳이다. 전날 둔내에 짐을 푼 필자는 다음날 장날에 맞춰 횡성시장을 방문했다. 장에는 김장철과 맞물려 무, 배추, 알타리, 새우젓 같은 김장채소와 젓갈류가 눈에 띄었다.
장구경 하다 배가 출출해서 다슬기 듬뿍 들어간 해장국과 묵사발 한 그릇에 치악산막걸리 한 병으로 배를 채웠다. 장날에만 임시천막을 치고 들어서는 식당이다. 본가는 원주 남부시장 안에 있는 ‘청정다슬기해장국’이다. 식당과 장날 다슬기해장국 특 가격은 같지만 보통은 장날이 약간 싸다. 물론 다슬기 양과 비주얼, 밑반찬 등이 식당과는 사뭇 다르지만 시장은 시장 나름의 덤과 인심이 따라 붙는다.
오묘한 초록 빛깔을 띠는 다슬기는 영월로 넘어가면 올갱이로 불린다. 올갱이는 원래 충청도 지역 유래 방언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따르면 간 기능 개선, 숙취 해소, 해독 작용, 시력 보호 등의 효능이 있다. 현대에서는 타우린, 아미노산, 마그네슘, 엽록소 등이 함유되어 있어 간 건강과 소화 기능 개선, 피부 건강 유지, 노화 방지, 빈혈 예방과 같은 효능이 입증됐다.
밑반찬으로는 겉절이 한 가지가 나오지만 일당백의 맛이다. 모자라면 얼마든지 퍼다 먹을 수 있다. 겉절이는 판매도 하는데 안사고 못 배기는 맛이라 결국 한 팩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묵사발은 시장 인심을 담은 듯 푸짐했다. 10년 만에 맛보는 원주 치악산 생막걸리는 여전히 갈증을 해소하는데 최적화된 시원한 맛이다.
건홍합, 연탄불에 구운 즉석김, 특별히 좋아하는 매운맛 고추부각과 숙소에서 구워 먹을 소고기 등심, 업진살, 차돌박이를 샀다. 횡성 한우식당을 가고 싶었지만 서울 마장동축산시장과 크게 다를 바를 못 느껴 전략적(?)으로 ‘패싱’했다. 횡성시장 상인들 인심이 좋게 느껴졌고 장이 차분하고 알차다. 가끔 고속철도 타고 구경삼아, 쇼핑삼아 가면 좋을 듯하다.
횡성 5일장을 가기 전날은 둔내 시내를 둘러봤다. 조그마한 동네답게 볼거리는 크게 없었지만 스키장 때문에 겨울이면 북적거리는 도시로 변한다. 둔내는 2017년 경강선(현 강릉선) 개통과 함께 신 역사 영업이 개시됐다. 읍내에서 떨어져 있는 횡성역과 달리 진부역과 함께 면 소재지와 비교적 가깝게 지어졌다.
둔내 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 유적뿐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고분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됐다. 까마득한 선사시대부터 첩첩산중에 인류의 조상이 살았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둔내면이라는 지명은 둔창(屯倉)에서 유래했다. 둔창은 둔전(屯田)에서 수확되는 곡식을 저장하는 곳이다. 둔내면 둔방내리에 둔창이 있었다. 둔전이 고려 후기에 설치돼 조선시대에 성행한 것으로 보아 둔방내리 둔전도 이때쯤으로 추정한다. 구전에 따르면 둔창에서는 주민에게 매년 양곡 300섬 씩을 대여했는데 규모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둔내 시내를 가로지른다. 강 좌우에 크고 작은 들판을 형성해 둔내 곡창지대를 이룬다. 둔전과 둔창을 둔 가장 큰 이유가 주천강 주변 옥답 때문이 아니었을까. 주천강으로 나뉜 둔내를 동서로 이어주는 둔내교의 서쪽에는 ‘자포곡리’란 표석이 서 있다. 표석 뒷면에는 ‘자포상선’이란 한시가 적혀 있다. 현재 자포리인 자포곡리는 개울물이 많아 상선이 드나들 수 있는 포구가 있던 마을이다.
웰리힐리파크부터 둔내면까지 걸으면서 역사문화관광자원을 찾아봤지만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횡성둔내철기시대주거유적지를 비롯해 웰리힐리파크, 별무리관광농원, 올챙이전시관, 국립횡성숲체원, 주천강변·둔내·청태산자연휴양림, 산채마을, 태기산풍력발전, Eco800 태기산트레킹, 국순당 횡성공장 ‘주향로’ 등 볼거리와 체험 자원(구슬)이 제법 많은 데 꿰어지지 않는다.
서울행 버스조차 없었던 둔내면에 1시간이면 오가는 교통수단이 있다. 교통 장점과 지역의 청정자원을 잘 결합시킨 생태 웰니스 관광에 둔내는 좀 더 역점을 기울여야겠다. 올해부터 둔내면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됐다니 이참에 역사문화와 생태가 잘 어우러진 관광명소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내년에는 역사문화답사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에서 둔내 당일 관광코스를 개발해 볼 예정이다.
둔내에는 다행이 솜씨 좋은 향토음식점이 있어 식후경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둔내교에서 주천강을 따라 상류로 500여미터 오르면 멀리 언덕배기에 ‘둔내민속촌’이 보인다. 외관은 한옥 같지만 서까래 없이 실용적으로 꾸민 식당 내부가 비교적 넓다. 야간에 찾은 탓에 주변 경관을 살필 수 없었지만 정보를 뒤져보면 산책을 할 정도로 외부 공간도 넓고 잘 정돈돼 있다.
강원도 명물 곤드레나물밥과 더덕구이백반, 감자전을 맛 봤다. 토종닭백숙과 닭도리탕은 사전에 주문을 해야 한다. 감자전과 함께 막걸리를 주문하자 허생원메밀꽃술이 따라 나왔다. 지역 막걸리를 맛보는 것은 여행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허기 탓에 커다란 감자전은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어 곤드레나물이 한껏 뒤덮인 갓 지은 돌솥과 흰 쌀밥 돌솥이 밑반찬과 함께 제공됐다. 화려하지 않지만 발효 숙성된 오가피, 참나물, 머위, 민들레, 곰취, 엄나무순 등이 랜덤으로 제공된다. 또 묵은지 지짐, 깍두기, 토장, 비지찌개 등이 상을 단단하게 채운다. 발효된 갖은 나물 반찬을 한상 가득 내는 정성이 갸륵한 곳이다.
소박한 듯 묵직하고 상이 꽉 차 보이는 깊은 맛의 밥상이다. 둔내면의 도시 슬로건은 ‘둔내에 둔 내 마음’이다. 둔내민속촌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설 때, 마음만은 두고 오고 싶을 정도의 매력적인 향토 맛을 경험했다.
서울서 당일치기부터 2박3일 정도 여행으로 적합한 횡성, 둔내는 기차만으로도 충분히 올갈 수 있는 곳이다. 한 달에 6회 정도 열리는 횡성 5일장을 끼고 교통체증 없는 기차 여행 나들이 한번 나서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