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나우 개관 20주년 기념전 ...‘유산: 이어받은 시간전’
박수근-박성남-박진홍, 천경자-수미타김, 허영만-허보라, 하인두ㆍ류민자-하태임, 허건(남농)-허진(손자), 오지호-오지호 오승윤 –오병욱 오병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선대의 역사. 그 DNA를 이어 받아 역사적 유산을 이어가는 아름다운 이름들. 갤러리 나우의 개관 20주년 기념전은 현대 한국미술의 전시기획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전시다.
거장들의 이름석자와 그의 생물학적 유산들이 공간을 채우는 것 자체로 관람객을 발길을 곳곳에서 멈춰 세운다. 박수근 화백의 ‘시장의 여인’, 나래코리아 김생기 대표(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가 소장한 천경자 화백의 ‘소녀’, ‘인도 올드델리의 풍경’ 등 귀한 작품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갤러리 나우 이순심 관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 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예술 가문의 서사, 즉 2대, 혹은 3대에 걸쳐 세대의 장벽을 허물고 예술적 가치를 계승해온 부자, 모녀, 부녀, 모자, 손(孫)으로 이어온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하고자 마련됐다”고 운을 뗐다.
이어 “1세대 작가가 지켜온 정서와 미학적 원형에,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새롭게 변주된 2세대 작가들의 독창적이고 시대정신에 입각한 시선, 거기에 핏줄보다 진한 예술적 유대감으로 이어지는 숭고함을 들여다보는 전시”라고 말했다.
김종근 미술평론가는 “동서양 미술사에서 대를 이어 예술적 재능을 꽃피운 부자 및 부녀 화가들의 사례와 그들의 예술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며 “예술은 가장 개인적인 삶의 기록이자, 동시에 가장 강력한 문화유산으로 이번 ‘아티스트 패밀리’ 전시는 한 울타리 안에서 피어난 두 개의 서로 다른 예술적 자아를 조명하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 평론가에 따르면 이번 전시에서 박수근 화백은 평생 추구했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이라는 예술적 철학이 아들 박성남의 작품 세계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박수근이 한국적 정서를 담아냈다면, 아들 박성남은 이를 현대적인 ‘빛과 중용’의 미학으로 재해석해 세대 간의 예술적 대화를 보여 주고 손자 박진흥도 ‘계승과 변주’라는 키워드로 세대 간의 대화를 조형화 한다.
수미타김(김정희)은 한국 미술의 거장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이자, 현재 천경자재단 이사장, 미국 몽고메리 칼리지 미술과 교수로 활동 중인 화가이며 문범강 작가(조지워싱턴대 미술과 교수) 부인이다. 천경자의 차녀로서 ‘길례 언니’ 풍의 여인상을 그릴 때 주요 모델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한국에서 성장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방인이자 교수, 화가로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오지호, 오승우·오승윤 화백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기틀을 닦은 3부자 화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 명문가를 이루고 있다. 오지호(1905~1982)는 한국적 인상파 미술의 선구자이며 오지호 화백의 장남 오승우(1930~2023)는 구상 미술의 대가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오승우 화백의 자녀는 서양화가이자 전 동국대학교 미술학과 오병욱 교수와 무안군 오승우미술관 등에 작품을 기증하고 작가 활동을 하는 오상욱 조각가가 있다.
오승윤(1939~2006)은 오지호 화백의 차남으로 ‘오방색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적 정서를 담은 풍수 시리즈가 유명하다. 오승윤 화백의 아들 오병재는 서양화가로 활동하면서 3대 화맥을 잇고 있다. 이 가문은 현재 손자 세대까지 예술가로 활동하는 등 한국에서 보기 드문 미술 4대 가문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김강용 작가는 벽돌 화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 모래를 사용해 캔버스에 레이어를 쌓고 화면에 벽돌의 형상과 그림자를 구현함으로써 실재와 환영의 경계를 탐구하는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했다. 부인인 김인옥 작가는 서정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채색 동양화가다. 두 사람은 홍익대 선후배 사이로 경기도 양평군 항금리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장녀 김재원은 부모 뒤를 이어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신예 화가로 화업 대를 잇고 있다.
김병종 작가는 두 아들이 서울대에서 각각 한국화와 조각을 전공, 예술가 집안으로 알려졌다. 김병종 작가는 생명의 노래를 주제로 서울대학 교수를 정년하고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등 수묵과 채색 작업을 하는 현역화가다. 장남 김지훈은 단국대 교수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현대 문명 속에서의 인간관계 상실 등 다양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둘째 김지용 작가는 조각과 입체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위장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담고 있으며 가치관의 공존과 인간 내면의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을 다루고 있는 면에서 아버지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남농 허건의 장손 허진(1962~)은 운림산방의 예술 전통을 잇고 있다. 전남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할아버지 허건이 집대성한 전통적 남종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유목동물’ 시리즈가 알려져 있다.
이 가문은 운림산방 계보로 불리며 조선 말기 화가 소치 허련으로부터 시작된 호남 남종화의 화맥을 잇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미술 가문이다. 3대 화가인 남농 허건은 전통 남종화의 수묵 중심 화풍을 바탕으로 대담한 필치와 농담의 대비를 강조한 산수화를 통해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했다. 허진은 할아버지의 명성이 주는 부담감 속에서 200여 년간 이어진 운림산방의 화맥을 5대째 잇는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석주는 한국 연극계의 거목인 이해랑 선생의 아들이다. 이사라 작가와는 부녀 관계로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아버지 이해랑 배우와 3대에 걸친 예술가 가문을 이어가고 있는 가족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한국 극사실주의(하이퍼 리얼리티즘) 작가로 1970년대부터 서정적 극사실 회화 작품을 현재까지 이끌어온 1세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사라는 원더랜드를 그리는 팝아트 작가다. 부녀가 기법과 화풍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만 예술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치밀한 작업으로 독창적인 아이콘을 만들어내어 공통된 ‘예술 DNA’를 공유하고 있다.
김한용과 김대수는 사진작가 부자 관계다. 두 사람은 한국 사진사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예술가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김한용은 한국 광고사진의 대부이자 1세대 광고사진가로 불린다. 1950년대부터 한국 근현대사의 모습과 광고사진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아들 김대수는 홍익대 미대 교수를 역임한 중견 사진작가로 주로 대나무 등 자연을 소재로 한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2024년에는 두 작가의 작품을 함께 조명하는 2인전 ‘꿈의 공장’을 개최, 기억을 공유하는 부자간의 예술적 교감을 보여주었다.
김근중은 초기부터 민화풍의 꽃과 현대적 조형 언어로 유명한 작가로 초기에는 벽화 기법 추상 작업을 주로 했다. 이후 점진적으로 추상과 화려하고 민화적인 꽃 그림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중견 작가다.
김근중 작가가 전통 민화의 도상을 현대적 팝아트 형식이나 화려한 색감으로 파격적으로 재구성했다면 아들 김선웅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매체의 확장과 내면적 추상으로 다변화를 꾀했다고 볼 수 있다. 김선웅은 독특한 구상 인물화에 기하학적 패턴을 넣은 추상화 같은 자화상(결정되지 않은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김세중, 김범·유현미 역시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예술가 가족이다. 김세중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한 대한민국 1세대 조각가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부인은 여류 시인 김남조이며 아들 김범은 90년대 한국 개념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일상적인 대상을 비틀어 보는 기발한 상상력과 위트로 고정관념을 뒤집는 유머와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주는 개념미술가이다. 김범 작가의 부인 유현미는 회화와 조각,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하인두 작가는 한국 1세대 추상화가이자 앵포르멜 운동의 주역으로 불교적 세계관을 담은 ‘만다라’ 연작으로 유명하다. 부인 류민자는 동양화가로 전통적인 도상(반가사유상, 탑 등)과 자연의 생명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을 했다.
하인두 화백은 생전에 딸 하태임에게 "너는 반드시 작가가 될 것"이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딸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는 꿈을 꿨다. 그러나 하태임 작가가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89년에 작고했다. 딸은 홀로 파리에서 유학 후 귀국해 ‘컬러밴드(Color Band)’ 시리즈 작업으로 최근 가장 ‘핫한’ 작가가 됐다. 하태임 작가뿐만 아니라 아들 하태범(조형예술가)도 예술적 재능을 주목 받고 있다.
한만영과 한승구 작가는 부자 관계로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적 전통을 잇는 대표적인 아티스트 가문이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매체와 방식으로 ‘존재와 가상’에 대한 탐구를 공유하는데, 한만영 작가는 한국 현대회화의 지평을 넓힌 거장으로 ‘시간의 복제’와 ‘창조’로 명화의 도상을 현대적 사물과 결합하는 동양과 서양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병치 시키는 기법이 특징이다.
아들 한승구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조각과 뉴미디어를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조각에 IT 기술, 영상, 인터랙티브 요소를 접목한 뉴미디어 아트로 주목을 받고 있다.
만화가 허영만 화백과 허보리 작가는 부녀 관계로, 한국 만화계의 거장이 현대 미술계의 개성 있는 서양화가를 낳은 특별한 예술가 가문이다. 허영만은 식객, 타짜, 날아라 슈퍼보드 등으로 한국 만화사를 새로 쓴 국민 만화가로 철저한 취재와 세밀한 묘사력이 특징이다. 딸 허보리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활발히 활동 중인 중견 화가다.
허영만 화백은 딸이 힘든 예술가의 길을 걷는 것을 초기에는 반대했지만 딸의 재능을 확인한 뒤에 후원자가 됐다. ‘허영만·허보리: 만화와 회화의 만남’ 같은 전시를 통해 예술적 동료로서 조언과 교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김 평론가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작업 과정을 보고 자라며 예술적 환경에서 예술적 언어를 자연스럽게 체득함으로써 예술가의 DNA가 단순히 외모가 아닌 붓질의 습관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유전된다는 점에서 이번 아티스트 패밀리 전시는 흥미로운 서사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