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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수 셰프의 파인다이닝 '두레유'

온누리약국체인 대모 박영순 전 회장과 겸상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산책] 박영순 다희연 회장을 다시 만난 것은 정확이 11년 만이다. 2007년 약국 프랜차이즈 취재를 하면서 역삼동 한 식당서 육전을 먹었던 기억이 마지막이다. 박 회장은 우리나라 약국 프랜차이즈 효시인 온누리약국 체인을 만들어 수천 명의 약사를 제자 아닌 제자로 양성하면서 약업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박 회장은 부산대 약대를 나와 원광대에서 생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약국을 하면서 양약의 한계를 절감하고 관련 학문에 파고들다가 건강보조식품, 한의학을 이용한 치료로 영역을 확대했다. 치료효과가 소문나자 한방제제 전문 제약사서 한방특강을 부탁했다.


그때 교육을 받은 약사들이 삼삼오오 모인 것이 온누리약국 체인이다. 또 이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것이 건강보조식품 회사 렉스진바이오텍, 대국민 사회복지 사업을 하는 온누리약국복지회 등이다. 


박 회장과 종로구 가회동에 유현수 셰프가 경영하는 퓨전 한식 레스토랑 두레유에서 만나 점심 식사를 했다. 두레유는 박 회장이 선택한 곳이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는 기별이 왔다. 필자는 그전에 이미 도착해 근처 커피숍에서 시원한 냉커피를 한잔 즐기고 있던 차였다. 서둘러 두레유를 찾았고 결과적으로 예정 시간보다 15분가량 앞당겨 만났다.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두레유’서 11년 만에 만나 점심 식사 


예쁜 꽃모자를 쓰고 감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박 회장 모습은 여전히 그 옛날 소녀 감성이 느껴졌다. 박 회장은 밝은 미소로 맞았고 투박하지 않고 정감이 살짝 묻어나는  나지막한 부산 사투리로 반겼다.


두레유는 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어서 예약을 했노라고 했다. 좋은 맛의 경험이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식성이 토속적인 맛을 좋아하는지라 두레유 음식이 입맛에 맞았다고 했다. 유현수 셰프는 아쉽게도 자리에 없었다. 평창동에도 두레유가 한 곳 더 있는데 그곳에 근무하는 날이라고 종업원이 전해줬다.    


박 회장은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약대를 졸업하고 어떻게 사회를 진출해야 할지 막막한 시절, 지구 땅덩어리 반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읽으면서 삶의 목표를 정하게 됐다고 했다. 


“사회인이 되는 순간 자기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입시에 떠밀리고 국가고시 공부하느라 정체성을 못 찾던 때 불현듯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위인전, 성경, 불경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됐다.”


대학 4학년 때 만난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傳記)는 박 회장의 인생에 큰 전기(轉機)를 가져다줬다. 알렉산더 대왕은 약관의 나이에 세계정복에 나서 28세에 대륙의 반을 정복하고 33세에 모기 한 마리를 못 당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그때 알렉산더 대왕은 유언으로 관 밖으로 양손을 내놓으라고 했다. 공수래공수거 인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한옥이 즐비한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한식 레스토랑 두레유 입구에서 박영순 다희연 회장(우)과 필자. 박 회장은 다정한 포즈를 위해 어깨에 손을 집어보라고 했다.


대학 4학년 알렉산더 대왕 전기 읽으며 인생 목표 찾아


박 회장은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삶의 목표와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망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정복자의 삶이 온통 전쟁과 약탈, 식민과 수탈의 역사로 점철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타적인 삶이 아닌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삶이었기에 차갑게 빈손으로 관속에 들어갔을 것이란 해석으로 읽힌다. 그러면서 박 회장은 자연스레 먼저 세상을 떠난 부군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헤맸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이미 중학교 때 ‘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때 정한 것이 ‘제5의 사과’가 되겠다는 것이다. 인류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사과 다섯 개의 사과 중 하나가 되겠다는 의미다.”


박 회장에 따르면 첫 번째 사과는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다. 일명 선악과인 그것은 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사과였다. 두 번째는 빌 헤름텔의 사과다. 이는 신의와 충성과 결단을 의미한다. 인류가 그때부터 신의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과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뉴튼의 만유인력 사과다. 네 번째는 서로를 용서하며 마시는 사과주의 사과. 그리고 다섯 번째가 남편의 사과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속의 사과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약속을 하고 지키는 데 있다는 것이 박 회장의 지론이고 남편이 남긴 유훈이다.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스스로와 또는 사회와 한 이타적 약속들을 지켜나가는 것이 사회와 인류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남편이 남긴 약속이라는 ‘제5의 사과’ 실천하는 삶 추구


박 회장은 남편으로부터 ‘제5의 사과’ 이야기를 듣고 대학 졸업 후 약국을 개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약사로서 국민건강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자신과 약속을 한 것이다. 종업 후 선배 약국에서 수련을 하면서 임상을 배웠다. 박 회장이 다녔던 시절 약학대학은 4년 동안 임상약학을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약국 현장에서 약사들은 대부분 대증 처방밖에 할 줄 몰랐다. 


어느 날 박 회장은 요통 환자를 접하면서 단순히 진통제 처방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화학 책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지 5년, 그리고 부족함을 느껴 한방 공부한 지 5년이 지나자 흩어져 있는 학문이 한데 유기적으로 엮이기 시작했다.        


“대학 때는 학문이라는 각각의 구슬만 던져줬지 꿰어 주질 않아서 하나도 모른다. 그래서 구슬 하나하나 다시 공부해서 꿰었다. 그러니까 병이 생기는 원인을 알게 됐다. 그런데 양약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방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그렇게 시작한 공부로 약국가에 영양과 한방요법을 적극 도입해 돌풍을 일으켰다. 돌풍의 핵심은 ‘치료’였다. 그동안 양약에 의존했던 약사들의 처방을 건식을 이용한 영양보조요법, 한방제제를 활용한 한방요법 등과 병용시켜 치료효과를 극대화시켰다.


개국 약사들에게 단박에 소문이 나면서 ‘온누리’라는 이름으로 약국 체인이 만들어졌다. 약국 체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때 온누리약국은 박 회장의 독보적인 처방으로 늘 앞서 나갔다.  


종업원이 보리굴비에 녹차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박영순 회장. 그는 녹차의 폴리페놀은 최고의 항산화제라고 했다.


백년해로 약속 지키기 위해 제주 다희연 만들고 함께 지내


이런 국민건강 증진에 이바지하는 박 회장의 목표를 세우게끔 자극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남편이었다. 박 회장은 1969년 결혼식 전야를 회상했다. 두 사람은 다방에 앉아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이를 하늘에 고한다는 고천문(告天文)을 작성했다.  


“나뉘어 이승에 태어난 20여 년 그 기나긴 갈망의 세월 구비 돌아 이제 막 두 손 마주 잡고 불멸의 표목을 심노라...<중략>...불변의 빛깔로 해로하리니 창천을 밝히는 해님을 비롯하여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증인되리라.” 1969년 3월 1일


고위공직자였다가 정권교체와 함께 직장을 떠난 박 회장 남편은 해로를 약속했지만 오래지 않아 64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박 회장은 백년해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 씨 문중 선산 대신 제주에 터를 잡았다. 그 터는 박 회장이 한방 공부를 하면서 발견한 최고의 생약성분을 가진 ‘녹차’를 키우며 시묘(侍墓)를 하기 위한 곳이다. 박 회장은 녹차 생육환경이 좋은 땅을 수소문 끝에 제주에 6만평 밀림을 사서 개간하고 양지바른 곳에 묘를 쓰고 묘석을 세웠다.


개간 과정에서 생성된 지 아주 오래된 동굴이 발견됐고 그곳에 동굴카페를 만들었다. 차박물관, 짚라인 등이 더해지면서 복합테마공간 ‘다희연’(茶喜然)이 완성됐다. 다희연은 농업회사법인 ‘경덕’의 브랜드 이름이다.


다희연 녹차는 농약을 치지 않고 유기농법으로 키운 것으로 유명하다. 명색이 생약을 전공한 약학박사가 녹차에 농약을 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주 조천읍 선흘 6만 평 녹차밭 한쪽에 남편의 묘지를 조성하고 매일 아침 찾음으로써 해로를 실천하고 있다.  


박 회장은 “90살까지 활동해야 하는데 울산 선산을 오가는 것은 힘든 일이라서 사업을 하면서 곁에 두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 제주에 녹차밭을 일구는 것이었다”며 “고천문에서 백년해로하자고 맹세했기 때문에 이를 지켰고 앞으로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90살 까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2년간 준비 돌입


90살 까지 활동하겠다는 말에 귀를 의심했지만 박 회장은 차분하게 인생 2막을 설명했다. 앞으로 2년 동안, 75세가 될 때까지 공부해서 무엇을 해서 사회에 기여할 것인지를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특히 해외 저개발 국가 빈민의 건강과 자립을 돕는 일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질 오염이 심한 아프리카 지역에 우물을 파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염소 암수 한 쌍 씩 지원하는 사업 등 확정적이진 않지만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동남아 지역은 독재자들이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적도 국가는 무더위로 인한 무기력 때문에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질병과 위생에 취약해 삶의 질이 높지 않은 데 전문가로서 이런 분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보람되지 않겠나?!”


건강 유지를 위해 좋은 비방을 사용하는 것일까. 박 회장은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35도 육박한 염천에 두레유부터 안국역까지 일부러 걸어 내려오는 길에도 대화가 이어졌다. 다음번엔 강남 쪽에서 파인다이닝이 아닌 전통에 가까운 한정식을 대접해 드리겠다고 하니 손사래를 친다. 나이를 먹으면 지갑을 여는 게 지론이라고.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두레유’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표방하는 ‘두레유’의 한 여름철 ‘별코스’ 요리. 송로버섯, 철갑상어알 등 고급 식재료를 맛볼 수 있다.


한 시간 이상 박 회장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 사이 식사가 코스로 제공됐다. 두레유의 ‘별코스’를 주문했는데 독특하게 가장 먼저 7년 숙성 씨간장을 한 큰 술 정도 따라 준다. 음식 간에 따라 젓가락 끝으로 찍어 먹으라고 준 것이다. 결론적으로 특별히 씨간장을 찍어 먹을 일이 없었다. 요리 대부분 염도가 충분했다. 


본격적으로 음식이 나왔다. 와송죽과 물김치, 계절침채, 전, 아스파라거스와 송로버섯, 철갑상어‧척수‧캐비어, 해물찜,  방풍튀김과 나물우럭탕수, 전복찜과 게장퓨레, 산삼배양근을 곁들인 연저육쌈, 소갈비 식사, 디저트로 따뜻한 커피와 인절미티라미스가 적당한 시간을 두고 제공됐다.


멀찍이 종업원이 지켜보다가 빈 접시를 치우고 다음 음식을 내온다. 음식을 내올 때마다 설명을 곁들이는 데 이날은 외국인 종업원이 어눌한 우리말로 어려운 우리 음식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한편 두레유가 추구하는 파인 다이닝은 기본 8~10가지 음식이 나오는 코스 메뉴로 음식이 소량씩 제공된다. 특히 게절 식재료를 기본이고 고급 식재료를 과감히 사용하면서 기술이 요하는 조리법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이다.


두레유는 195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처음 ‘두레’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것을 유현수 셰프와 컬래버레이션으로 재탄생시켰다. 다음번 방문 때에는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만 봤던 유 셰프를 직접 만났으면 한다. (2018.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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