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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식해도 기분 좋은 미식도시 전주

천년 예향 전주 1박2일 문화유산답사와 맛집탐방기<2>

줄알 육수에 들깨 향 가득 ‘베테랑칼국수’

우리소리 들으며 전통 쌍화차 음미 ‘행원’

전주비빔밥 단일메뉴 대표식당 ‘가족회관’                

        

11월 첫 주 1박2일 전주행의 이튿날 기록이다. 간밤에 한참을 걷다가 새벽 2시가 돼서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지역 관광호텔이었는데 예약자 명단에 없다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때마침 빈방도 없었다. 이슥한 시간 따질 마음이 없어 발길을 돌려서 나왔다.           


어딘들 나그네 몸 하나 누일 곳이 없겠냔 생각으로 인근 숙소를 뒤졌다. 그러던 중 10여분 후에 호텔에서 예약자 명단을 발견했다는 전화가 왔다. 다행히 밤길을 많이 헤매지 않았다.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했던 터라 씻지도 않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다음날 아침을 맞았다. 커튼을 젖히자 2년 전 이맘때 전주에서 맞이한 하늘과 닮아 있었다.            


그때는 전주의 ‘행원’이란 곳에 볼 일이 있어서 찾았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전통문화체험관광프로그램 수행기관이 ‘행원’이었고 이를 중간 평가하고 컨설팅을 지원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행원은 예향의 도시 전주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같은 곳이다. ‘소리가 있는 한옥 카페 행원, SINCE 1928’을 대문에 써 붙여 놓고 있는데, 그만큼 유서 깊은 곳에다가 ‘소리’라는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다.    

       

예향의 고향 전주 대표명소 ‘행원’     

          

권번, 조선요리집과 요정, 한정식집 등 주인이 바뀔 때마다 업종을 달리하며 맥을 이어 온 ‘행원’은 예향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다. 곱돌 잔에 제공되는 쌍화차는 ‘행원’의 대표차다.

행원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식도원’이란 조선요리집으로 10년간 영업을 했다. 1938년엔 ‘낙원’이란 상호로 바꿔 조선요리집을 하다가 1942년 지금의 ‘행원’이란 이름의 요정으로 변모했다. 전주 마지막 기생으로 불리던 여류화가 남전 허산옥(1926~1993)이 인수해 영업을 했다. 전주국악원이던 ‘낙원권번’을 인수해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허산옥은 수많은 문화예술인을 후원했다고 전해진다. 미술인 가운데 변관식, 이상범, 김은호, 이용우, 조방원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이 행원에서 많은 날을 묵고 갔다. 그는 개인전 7차례, 국전 입선 15회, 특선 1회라는 화려한 화가 경력을 가진 작가였다.        

  

행원은 1983년 무렵 판소리 전북도 무형문화재 성준숙 씨가 주인이 되면서 한정식집과 소리공부방 기능을 했다. 2017년 4월 문을 닫았고 3개월간 리모델링을 거쳐 한옥카페로 거듭났다. 지금은 성 씨의 자녀와 전북전통문화연구소가 공동운영하고 있다.       

    

행원은 당대의 국악인이나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권번이란 부정적 이미지도 있지만 예능을 전수해 이어오던 곳으로 문화예술의 산실 역할을 했다는 공이 커서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행원은 소리 공연을 보면서 전통차를 음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통 한옥이 아닌 독특한 일본식 한옥구조도 볼거리다. 최근에는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전주 핫 플레이스 중 한 곳이다. 지난번 마신 제대로 끓인 쌍화차 맛이 아련히 떠올라 입맛을 다시게 했다. 16시간을 끓이고 감미료 없이 재료에서 자연스레 단맛이 나도록 하는 게 특징이다. 맛은 기억이고 추억이다.        

    

숙소를 나서서 전라북도예술회관서 열리고 있는 ‘2021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전시를 둘러보고 풍남문을 통해 한옥마을로 접어들었다. 과거 전주부의 4대문이던 전주부성의 풍남문, 동문, 북문, 서문 일대 옛길에는 전주의 역사가 오롯이 켜켜이 쌓여있다. 특히 조선시대 역사자원과 근대문화자원이 집중돼 있다. 북문이 있던 걷고 싶은 거리, 영화의 거리, 풍패지관(전주객사), 전주부성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은 풍남문(보물 제308호), 천주교 순교지로 전주옥터가 있던 한국전통문화전당, 동문이 위치해 있던 동문예술거리 등은 도보탐방코스로 제격이다.              


강한 맛 고명이 특징 ‘베테랑칼국수’     

      

‘베테랑칼국수’는 계란, 들깨, 김 맛이 면과 어우러지면서 묘하게 제3의 맛을 내는 독특한 칼국수다.

도보답사는 아침 식사 후로 미루고 지난밤에 가려다 말았던 ‘베테랑칼국수’ 식당을 찾았다. 오전 9시에 문을 열어서 아침 식사 식객들에게는 반가운 곳이다. 본관과 별관 널찍한 식당 안에는 이미 식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면을 입안으로 후루룩 말아 올리고 있었다.      

     

칼국수는 물갈비와 함께 전주향토음식으로는 후순위 주자다. 전주시에서 선정한 향토전통음식업소는 전주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정식, 돌솥밥, 전주백반, 오모가리탕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테랑칼국수’ 같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면식을 좋아하는 입맛 탓이리라.         

  

선금을 치르고 나니 달달하고 꼬들꼬들한 식감의 깍두기와 단무지가 밑반찬으로 제공됐다. 잠시 후 크지 않은 스테인리스 면기에 칼국수가 나왔다. 칼국수에 계란탕 수준의 줄알을 푼 육수를 붓고 그 위로 김가루, 들깨가루, 고춧가루 고명이 얹혔다. 처음 보는 칼국수 비주얼이라 내심 놀라웠다. 웬만한 음식은 보기만 해도 맛이 읽히는 데 이곳 칼국수는 읽어내기 어려웠다.         

  

고명을 풀고 국물 맛을 봤다. 계란, 들깨, 김 등 강한 세 가지 맛이 혀끝을 교란했다. 정통 칼국수와는 완전히 달랐다. 바지락이나 홍합이 없는 것이 필시 멸치 육수일 텐데 멸치 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개성 강한 식재료가 잔뜩 들었기 때문이다. 계란, 들깨, 김 맛이 어우러지지 않을듯하지만 면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묘하게 제3의 맛을 냈다. 필자는 이를 페이스북에서 ‘매우 변칙적인 맛’이라고 표현했다. 평양냉면처럼 호불호가 갈릴만한 칼국수다.           


식당 문을 나서는 데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기온도 오르고 하니 한옥마을은 오랜만에 어린이집 원생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한옥마을 곳곳에 심긴 은행나무 고목이 완전히 샛노랗게 물들었고 경기전 안쪽은 형형색색 단풍이 장관이다. 3000원이라는 비교적 비싼(!) 입장료의 경기전에서는 때마침 국보 제317호인 태조어진 진본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한옥마을 인근에 역사자원 집중     

         

<사진3>사진 상단 좌부터 시계방향으로 경기전, 오목대, 색동한복을 입고 한옥마을을 찾은 어린이집 어린이들과 풍패지관. 한옥마을 인접지역에 역사문화자원이 밀집해 있다.

경기전은 태조 어진을 봉안한 정전을 중심으로 한 영역을 말한다. 정전은 보물로 지정돼 있고 경기전 내부에는 어진박물관,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한 전주사고, 전주 이 씨 시조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와 예종 태실과 태실비, 수복청 등이 있다. 어진 진본은 모사품과 구분하기 힘들었고 사진촬영도 허용되지 않아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태조의 어진을 자주 접한 것도 한 이유다. 사진촬영을 금지한 이유를 써 붙여 놓지 않은 것은 대민 서비스 정신 부족이다.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허용해도 되지 않겠나 싶다.         

  

경기전 맞은편 전동성당은 아쉽게도 외관 보수공사 때문에 실물을 온전히 볼 수 없었다. 전동성당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이 모친상 때 교리를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자 유림들이 들고일어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사건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순교 100년이 지난 1891년 봄에 전교를 시작해 1908년 건축을 시작했다.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 23년 만인 1914년 완공됐다. 전주부성 서문 근처 차이나타운은 전동성당을 지을 때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들이 정착하면서 만들어졌다.           


전주 객사인 풍패지관은 발굴조사 작업이 한창이다. 파헤친 앞마당에는 옛 유구들이 제법 많이 드러났다. 지인이 오목대를 꼭 한번 올라가 보라고 해서 발길을 돌려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오목대는 고려말 이성계가 운봉(남원시 운봉읍)에서 왜구를 막고 개성으로 개선을 하는 도중 그의 선조가 살았던 전주에 이르러 감회를 풀었던 곳이다.           


이성계는 종친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고 기분이 좋을 데로 좋아진 그는 대풍가를 불렀는데, 이때 종사관을 따랐던 정몽주가 못마땅해서 주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오목대 중턱 전망대에서는 한옥마을이 고즈넉하게 내려다 보였다. 지인의 권유는 이 풍경을 놓치지 말란 의미였으리라. 오목대 조명 등이 몇 개 깨져 있고 오목대 비각 역시 단청이 많이 상했다. 철제 난간도 부서져 있는 등 전반적으로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한옥마을 골목을 요리조리 몇 번을 돌았다. 그러다가 전주향교까지 이르렀다. 전주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 만들어졌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 근처였다. 조선조에 들어 태조 이성계 영정을 봉안하는 경기전이 들어서서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유생들이 이전을 요구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옥마을을 몇 바퀴 얼추 돌다 보니 시장기가 돌았다.             


전북무형문화재의 집 ‘가족회관’     

       

전주비빔밥 전문점 ‘가족회관’의 참한 육회비빔밥 한상 차림.

전주비빔밥을 접하기 위해 ‘가족회관’으로 향했다. 전주비빔밥의 원류는 콩나물로 지은 밥에 오색, 오미의 30여 가지의 지단, 은행, 잣, 밤, 호두 등과 계절마다 다른 신선한 야채를 넣어 만들었다고 한다. 영양소 밸런스를 완벽하게 갖춘 영양식품이면서 건강식품으로 음양오행이 깃든 약선요리다.           


비빔밥은 ‘지어놓은 밥에다 여러 가지 찬을 섞어서 한데 비빈다는 뜻’으로 문헌상으로는 골동지반(동국세시기), 부븸밥(시의전서), 부빔밥(조선요리제법), 비빔밥 등으로 변천했다. 전라도는 넓은 평야와 산, 바다 등에서 나는 다양하고 풍부한 식재료 덕에 남도 한정식이 발전했다. 이 중에서 비빔밥은 조선조 때 ‘감영 내의 관찰사, 농악패의 판 때 외에는 입 사치로 다루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식도락으로 즐겼던 귀한 음식이었다.          


과거에는 30여 가지 재료가 들어갔으나 요즘은 콩나물, 황포묵, 고추장, 쇠고기 육회, 접장 등을 중심으로 하고 나머지는 제철 식재료를 쓴다. ‘가족회관’에서는 콩나물국이 가운데 자리한 11첩 반상이 나온다. 콩나물국은 빼서 비빔밥 옆으로 배치시키고 콩나물국 빈자리는 뒤이어 나온 계란찜이 자리를 잡는다. 이제부터 방짜 유기에 담긴 비빔밥을 비비면 된다. 정갈한 반찬이 대접받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가족회관’은 1979년 문을 열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음식을 차리는 마음에서 상호를 ‘가족회관;’으로 지었다. 창업주가 전북무형문화재와 전주음식명인으로 지정돼 있다. 사골육수로 지은 밥에 마치 신선로처럼 고명을 돌려 담고 육회, 깨소금 가루를 뿌린다. 녹두묵에 치자 물을 들인 황포묵이 빠지면 전주비빔밥이 아니다. 이는 필자가 정한 기준이다. 그만큼 황포묵이 주는 색감이 강렬했고 희소성이 있었다. 찬이 정갈하고 맛있어 그릇을 비우느라 과식을 했다. ‘가족회관’은 가업을 잇는 백년가게다.      


1박2일 짧은 전주 일정이었지만 좋은 인상을 받아서 2회에 걸쳐 ‘썰’을 풀었다. 1회 차 제목이 ‘전주는 미식도시가 아니라 과식도시’였다. 2회 차는 ‘과식해도 기분 좋은 미식도시 전주’로 짓는다. 마무리가 기분이 좋았다, 전주 맛집 기행 기회가 또 있다면 현지인들이 숨겨 놓은 동네 맛집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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