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가 오나?.. 침대에서 일어난다. 베란다 문을 연다. 평소보다 컴컴한 날씨와 축축한 공기가 느껴진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밖을 바라보다가 출근 준비를 한다. 가방에 노트북을 넣고 어깨에 둘러맨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비닐우산을 챙겨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걸을 때마다 빗물이 스며 들어와 운동화의 앞부분이 조금씩 젖어간다. 찝찝하다. 본능적으로 엄지발가락을 오므린다. 지하철을 탄다. 운동화의 찝찝함은 잊어버릴 정도로 지하철 안은 눅눅하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지만 이 습함은 해결이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신논현역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집중한다. 그리곤 속으로 말한다. 어서 가자 지하철아.
지하철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간다. 앞부분이 다 젖어버린 운동화를 보면서 생각한다. 슬리퍼를 신고 올 걸 그랬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젖은 거 오므렸던 발가락을 펴 버린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뽀송뽀송함이 느껴진다. '역시 에이컨이 좋구나'라고 생각 하고 한쪽 구석에 우산을 펴서 말린다. 창밖으로 보란 듯이 비가 내린다. 술이 땡긴다. 머릿속엔 소줏병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물방울이 떠오른다. '삼겹살에 소주? 아니지. 오늘 같은 날엔 막걸리에 파전이지. 한잔 할 사람을 찾아볼까나?' 잠깐 생각하고 일을 한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비오는 날엔 유독 안된다. 그렇게... 생각의 흐름대로 순수했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른다. 비에 홀딱 젖어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운동화가 다 젖어도 뛰어놀았던 나의 모습이..
온돌방에 배를 깔고 이불을 둘러쓰고 방문을 열고 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게 좋았다. 양철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특히 좋았다. 그러다가 괜스레 밖으로 나가 비를 맞았다. 온몸이 다 젖어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엄마에게 혼나는 것만 빼곤 다 좋았다. 순수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온 동네방네를 돌아다녔다. 그 상쾌함이 좋았다. 마을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좋았다.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개울가로 간다. 얌전하던 개울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모습과 물소리를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상쾌했다.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턴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말이다.
지금도 비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 느꼈던 상쾌함과 깨끗함은 없지만 잔잔함과 차분함이 있다. 비가 오는 날엔 시원한 카페에 앉아 큰 유리창 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본다. 잔잔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을 보다가 커피 한잔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비가 온 탓으로 하늘은 평소보다 일찍 저녁을 알린다. 가로등이 켜진다. 축축해진 바닥 위로, 가로등 불빛 사이로 비가 떨어진다. 그렇게 빗물을 밟으면서, 운동화는 젖어가면서 걸어간다. 비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같은데 나는 다르다. 순수함이 줄어든 만큼 낭만이 늘어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