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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Feb 05. 2024

나로인한 어둠의 환경조성

분멸을 가장한 상처 들추기 좀 안하며 안돼? 나야? 


20240201목 / 욥4:1-12


> 묵상

고난 중에도 경건한 말을 유지하던 욥이 드디어 경건의 말이 아닌 땅의 말을 쓰게 되었다. 원망, 저주, 한탄과 같은 것들 말이다.(3:1-26) 

분명 그 앞절에만 해도 그의 몸은 고통 받았지만 그는 입으로 경건의 말을 했다. 

그리곤 그의 아내는 당신은 왜 온전함을 지키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3:9)했을 지경으로 그는 온전해 보였다.

Q. 그런데 그는 왜 지금은 온전한 말을 못하는가?


욥에게 사건들이 누적되었고 사건은 해결없이 시간과 함께 축적되고 있다.

분명 욥은 영육정신 모든 것이 피로했을 거다.

그리고 그의 아내 가장 가까울 그의 아내가 온전한 그를 원망했다. 그녀도 힘들었을 거 같다.

힘들어 죽겠으면 힘들다고 좀 사람이 짜증도내고 해야는데 그때도 반듯하니 얼마나 공감 못받는다고 느껴지고 속터졌을까? 난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아내의 입장은 그렇지만 남편인 욥의 입장은 달랐을 거 같다.

본래도 온전한 그인데 가장으로서 위기의 순간 잘 지탱하며 서있고 싶지 않았을까? 

공감 못받긴 욥도 마찬가지 같다. 그의 온전함이 얼마나 굳건했겠나? 


우리가 온전해봤자 연약함 위에 온전이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가까운 아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차라리 죽으라니 가까운 관계의 말을 통해 욥의 마음에 어둠이 들어오기 쉬웠을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욥의 친구들이 왔다. 처음이야 어이가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아무말 없었지만

결국 한마디라도 내 생각을 보태고 싶은게 사람의 악함이다.

욥은 자기 친구들이 끝까지 침묵하는 캐릭터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거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최소한 곁에 한탄을 들어줄 친구가 있게된거다.


그렇게 그의 원망, 저주, 한탄은 시작된다.


하늘의 언어를 쓰던 그가 땅의 언어를 쓰는 걸 묵상하며 나와 남편이 묵상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남의자식 잘되는 걸 보니 배아 아파서 인스타에서 안보고 싶었다.”는 말을 들은 부부목장 목자님이 나보고 드디어 땅의 언어를 쓴다고 기뻐하듯 말하셨다. 그러면서 “집사님, 이제 말씀이 들리시겠네요.”라고 하셨었다.

내가 그전에 말씀이 안들렸나? 그 전에도 들렸었다. 그런데 이게 뭔소리인가? 싶었는데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땅의 언어를 쓰게되니 더 보이고 느껴지는게 있었다. 


그리고 남편. 나의 남편은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자신을 판단할 때도 상황을 지나올때도 왠만하면 입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런데 어제 나는 남편의 그런 태도에 어이가 없어 싸우게 되었다.

욥의 아내의 말을 통해 욥의 마음에 어둠이 들어갈 환경이 조성된 것처럼 어제 나의 태도와 말로 인해 남편의 마음에 어둠이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오늘 엘리바스의 말처럼 무슨 일이 나에게 이르고 닥쳐서야 알게되는 것들이 있다. 

경험을 통해야만 알아지는 것들이 있는 한계있는 존재이면서 

남편을 바라 볼 때는 그도 나처럼 한계 있는 존재이고 그렇게 낮아져야만 보이는 하나님이 있다는 걸 인내하지 못한채 

순간의 감정으로 남편을 ‘독을 뿌렸으니 독을 거두지’하면서 인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당연한거 아니냐 주장한다. 

그러면서 나의 주장에 대한 근거와 이유들을 오늘의 엘리바스처럼 들이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인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했을까?

예수님이 관계를 맺고 대화하는 형식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분명 그들의 죄나 현상태를 직면하게 대화를 도우신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네가 그때 그렇게 했으니까 지금 네가 그렇지않냐?” 식의 대화는 분명 아니다.

그러니까 죄많고 흠많고 연약하고 나약한 우리를 자신보다 아래에 두고서 무시하듯 말하지 않는다.

죄는 죄니 네가 알고 직면해야지만 사랑과 온기를 잃지 않고 대화하신다. 

인과적 시선으로 예수님이 날 대했다면 나는 정죄감만 죽도록 느끼고 자괴감은 잔뜩 쌓인채 자존감은 바닥으로 추락해서 우울감만 더해지는 인생이어서 스스로를 쓸모없는 자라 느꼈을거다.

그런데 예수님이 날 그렇게 만나주시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만나주시진 않는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나는 남편에게 정죄감을 들추고 자괴감을 쌓게하고 가뜩이나 없는 자존감 바닥뚫고 지하로 내려가게 만들 지경이다. 남편은 나로인해 자신은 쓸모없는 자라 느꼈을 거 같아 그게 제일 마음이 아프고 이제와서 미안하다.


욥기에 들어왔으니 특별히 입조심 하고 살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스스로 입조심 할 수 없는 사람임을

틈만 나면 나의 옳음을 분별인척 가장해 상대방을 멸망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자임을 본다.

부디, 내 안에 성령이 살아 숨쉼이 나의 숨쉼보다 커지길 기도한다.


> 삶  

    회개기도  

    남편에게 사과하기 (쪽팔리지만)  


> 기도

주님, 말로도 얼마든지 타자를 어두운 환경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봅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대화를 하다보면 분별을 가장해 결국 남편에게 죄책감과 자괴감만 안겨줄 때가 참 많습니다. 전 제가 사랑이 많은 자라 생각했으니 착각하며 잘못된 사랑을 행한 자였습니다. 주 안에서 거할 때만 제가 그나마 온전을 바라보는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인과적인 시선이 아닌 날마다 주님 주시는 소망과 사랑의 시선으로 타자를 대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저는 봐야할 것이 너무 많은데 못보고 있으니 다시 이곳에 온 거 같습니다. 봐야 할 것들을 볼 수 있는 용기를 제게 주세요. 모든 말씀 나의 죄를 알게하시나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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