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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Feb 07. 2024

여지

Good is Bad. Bad is Good.

20240207 / 6:1-13


묵상

욥은 자신의 고난을 비유하며 이야기 한다. 사실 고난은 측정할 수 없는 부분인 거 같다. 

그렇지만 그는 측정을 가정해 자신의 고통을 얘기하고 있고, 그 고통의 무게가 욥에게 얼만큼으로 느껴졌는지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욥을 보면서 욥이 안타깝다란 생각보다 ‘측정 불가한 걸 측정하면서 얘기했는데 그게 바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가능한가? 바다 모래 무게면 그게 가늠도 안되는데? 욥은 자기 고난을 확대,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부터 드는 걸 보면

나는 욥의 친구들처럼 옳은 개소리를 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맞긴 맞는 거 같다.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운 고난 중에서 그래도 욥은 자신이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음을 기뻐한다. 

자신하며 말할 수 있는 욥의 당당했던 삶이 부럽기도 하고 

욥은 그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삶의 기준을 거역하지 않아야 될 행위들에 맞춰 피로하지 않았을까 어딘가는 좀 율법적인 인간도 되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자랑이 그에게 약인지 독인지 모르겠다. 


그냥 막연하게나마 알겠는건 이제 욥은 모든 것을 가진 자에서 모든 것을 이유없이 빼앗긴 자가 되어보았고

그처럼 가진 것을 영문도 모른채 빼앗긴 자들을 체휼할 수 있었을 거 같다.

이전의 욥이었다면 불가능 했을거다. 불쌍해서 도와는 줬을 거 같다. 

그런데 불쌍해서 동정과 행위로 돕는 것과, 진짜 그 불쌍한 처지를 내가 알아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다른 부분 같다. 


욥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드는 묵상은

인간인 우리는 결코 다 알 수 없다는 거다.

욥의 친구들의 옳은 소리가 옳은 개소리를 정성껏 하는 꼴이라고 알 수 있는 이유는

욥기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있기에 추측할 수 있어서이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옳지 않다한다. (42:7)

욥은 자기 삶의 결론으로 인해 지금의 일을 겪고 있지 않다. 


그런 것처럼 내 눈앞의 타자들이 겪는 모든 영역이 자기 삶의 결론으로 인한 것만은 아닐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는게 욥기라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타자의 얘기를 들을 때 겸손해야 하는 거 같다.

‘이게 이런거 아냐? 이건 그래서 그런거 같은데? 그건 이렇게 했어야지!’같은 생각이 

옳지만 틀렸을 수 있다. Good is Bad. Bad is Good.이 가능할 수 있다는 걸 욥기는 보여준다.


그런데도 오늘의 나는 내 눈앞의 타자를 대할 때 욥의 친구들처럼 생각하고 말한다.

난 옳은 개소리를 장황하게 정성껏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다.

그런 내 생각을 내려놓고 틀릴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게 겸손이고 오늘 내게 필요한 시선이라고 욥기는 말해준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건 이유없이 빼앗긴것(그런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과 이유를 알겠는 빼앗긴 것들 속에서

‘네 고난이 바다 모래같긴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를 해.’라고 이성으로 받아치지 않는 것 같다.

알고 있지 않나? 그 아픔을. 그러면 그 아픔을 같이 느끼고 곁에 있어주면 되는거다.

구원은 나에게서 남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남이니까.

오래 안 사이일수록 다 알겠어서 한 마디 보태려고 하지 않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제껏 살면서 한 모든 묵상들 옳았다 여겼는데 하나님은 ‘옳지 않다’ 하실수도 있다는 걸 알고 살아야 하는 거 같다. 


1.오늘 면접 잘 보고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2.내 생각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게 해달라 기도하는 것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존재임을 그러나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을 기억하길 기도합니다. 그러니 내 생각과 판단이 결코 하나님과 같지 않을 수 있음을 언제나 남겨두는 겸손이 있게 하시고 그럼에도 말씀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삶 자체가 하나님을 닮아감임을 기억하게 도와주세요.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만 살지 않게 하시고 타자의 아픔에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모든 말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는 우리에게 친히 살아낸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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