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속터진다는 전제 자체가 틀린 걸지도 몰라.
20240207수 / 욥 11:1-20
> 묵상
소발은 욥에게 말이 많다며 그러니 대답을 아니할 수 없단 식으로 얘기한다.
그리고 욥이 말이 많으니 의로울리 없다고 욥은 죄가 있을 거라 가정하에 욥, 하나님,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은 어떠할거고, 너는 이런 것이고 나라면 어찌 할 것이다 같은 말.
고대 사회에서는 병은 죄의 결과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고 한다.
욥이 얻은 피부병, 욥이 처한 상황들 그들은 죄의 결과라 생각할 만도 하다.
결국 욥의 친구들은 당시 익숙한 패러다임 안에서 사고하고 욥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과 관계앞에서 겸손해야 할 이유가 이런 부분인 거 같다.
익숙한 패러다임 안에서 확신하는 것은 모든 걸 알 수 없는 우리의 유한함에 대한 모순적 행동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내가 뭘 다 안다고 확신할 수 있나?
그런데 나는 얼마나 확신하나?
내 사고체계 에서는 남편은 무시가 되는 존재다.
이제껏 쉬면서 일을 나간건 단 4번 뿐이고, 집에 있는 내내 핸드폰, 담배, 소설책은 손에서 떨어질지 모른다.
시간이 아까운 자처럼 일 분 일초도 놓칠 수 없어 집안일 할 때는 무선이어폰을 귀에 꼽고 유튜브건 드라마건 틀어놔야 직성이 풀리는 남편이다.
일분 일초도 아까워 잠도 들지 못한채 핸드폰을 쥐고 새벽까지 한다.
나는 남편과 반대체계를 가진 사람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투두메이트 앱에 그 날 할 일을 기록하고 아침 일기를 쓸 때 시간을 적어 시간대별로 내 한 일을 기록한다.
일 분 일 초도 아까워 그 틈의 시간을 허투르 보내면 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어서 그 때 할 일들은 또 따로 있다.
그러니 남편이 너무 한심해 보인다. 그런데 웃긴건 삶의 만족도는 나나 남편이나 비슷하다는 거다.
어제는 너무 궁금해서 “오빤 오빠 인생을 그렇게 사는게 좋아?” 라고 물어봤다.
왜 물어봤냐면 당연히 한심해서 하나도 안 좋아 보이니까 내적동기라도 좀 생기길 바랬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아.”였다.
충격이었다. 저런 자기 자신이 나쁘지 않다니 그러니 맨날 남편은 목장에서 나눌 때 내가 기근이라고 하는게 이해된다.
자기 삶이 아주 좋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데 나는 그 삶이 나쁘다고 하니까..
그런데 내가 사고하는 패러다임은 절대적인가?
전 시대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말이다.
전 시대적으로 모든 인류에 결국 유일한건 예수 그리스도 하나 뿐 아닌가
그런데 뭘 그렇게 나는 내 사고를 절대시 하는지 모르겠다.
어쩜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 나의 옳은 개소리에
‘너 틀렸어. 정재성은 나태했던게 아니라 나를 만나기 위한 과정을 살아낸 것 뿐이야.’라고 해서 날 어이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궁금해서 꼭 천국에 가야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내 궁금증에 다 대답해줄 무한한 존재가 하나님밖에 없다.
> 삶
1.내 시선으로 남편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그냥 오늘도 제발 그냥 하루종일 폰하고 담배피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저게 장판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가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러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 기도
하나님, 욥에게 말이 많다는 소발은 정작 자기 말 많은건 모르나봐요. 그렇게 저도 정작 나만 모르는게 있을텐데 그게 뭔지 모르니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공동체와 말씀이 있어서 영영 모르기만한 인생은 아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익숙하고 옳은 사고라 하여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제가되게 인도해 주세요. 오늘 남편을 나와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춰 보지 않길 기도합니다. 절대적인 유일한 분은 예수님 한 분이고 그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으니 제가 진리인척 하지 않게 절 인도해 주세요. 이 모든 말씀 유일하신 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