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수가 없을 때

사춘기 언제 끝나는 걸까?

by 김혜진


25년 7월 1일 삿 1:1-10


> 묵상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그래도 가나안에 들어가 싸우는 문제로 이스라엘은 백성에게 묻는다.

그렇게 자기 멋대로 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이 상황에서는 묻는게 웃겼다.

이기고 싶으니까, 져서 죽고 싶지 않으니까 물어봤겠지? 생명이 걸린 일이니까 물어 봤을 것 같다.


어제 나도 죽을 것 같았다.

둘째가 핸드폰을 떨어트려서 망가뜨렸는데 핸드폰 사자마자 그런 일이 있어서 다음에 손에 들고다니다 망가뜨리면 이제 엄마가 고쳐주지 않는다고 주의를 줬다.

그런데 들고 다니다 망가뜨렸고 약속한대로 네가 다 고치던 네 용돈의 반을 보태어 고치라고 했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지만 아이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러자 핸드폰 고칠 필요 없다면서 화를 버럭 냈다.

화를 버럭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이미 약속된 말이었고, 그정도의 말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이 태도가 뭐냐고 아이를 훈계하고 있는데 남편이 저쪽에서부터 다가와서 엄청 신경질 적으로 쳐다봤다.

결론은 남편은 또 둘째를 정죄하고 싶어서 다가온거다.


어이가 없었다. 막내가 혼날 때는 슬퍼하고 숲에가 혼날 때는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둘째가 혼날 때는 왜 다가오는가?

왜 남편은 둘째를 정죄 못해서 안달이 났냔 말이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이랑 다투던건 남편과의 다툼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공부하러 스카에 간 큰애와 3차전이 벌어졌다.

왜 이제와서 엄마는 내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냐고 자퇴 못하게 막지말라고 내 진로 바꾸지 말라고

얘길 듣고 있으면 내내 아이를 방치하다가 갑자기 자기 진로를 이랬다 저랬다 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기가 막혔다. 정말 얘는 다양한 이유로 언제 어디서든 엄마 탓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만렙치였다.


홈스쿨도 큰애의 주도적인 결정이었고 홈스쿨이 자기 생각대로 안돌아가고 학교란 체제가 없다는 게 엄청난 불안이란 걸 경험해서 그때도 엄마를 원망하며 학교가는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학교가서 이번에도 자기 생각대로 안돌아가니 이번에는 관계 속 소외감을 운운하며 자퇴를 하겠다고 하는 거다.

결국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놓고 이것들을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한 것처럼 말하는게 기가 막혔다.

애초에 자기 인생에 관여 안하는 것과 이래라 저래라 하는게 공존할 수 없는건데 아이는 2가지를 내가 모두 행했다며 공격했다.

자기는 죽은거나 다름없이 학교를 다닌다며,


둘째의 호소와 눈물도, 남편의 짜증과 정죄도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그런데 난 큰애의 원망과 남탓 비난은 정말이지 죽을 거 같다.


가족에게 뜯어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지 오래 되었고,

어젯 밤엔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살아있나? 괴롭고 죽고 싶지만 죽을수도 없어서 울었다.

대체 난 왜 아이를 3명이나 낳은걸까? 정말 큰애 말대로 생명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왜 낳아서 이렇게 모든 비난을 다 받고 있는건가?


그런 전쟁같은 상황속에서 ‘하나님께 여쭈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절망하고 낙심만 한다.

당장 전쟁에 참패에 내 엄지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리는 것은 아니니 묻질 않는다.

한바탕 울고 불고 전쟁을 치르고 지옥을 살다가 모든 에너지가 빠지고 살 소망이 없어지면 그때서야 한탄스럽게 하나님을 찾는다.

그렇지만 그때도 방법은 잘 묻지 않는다.


아이들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무수한 것들을 물어보고 했었다. 진짜 일일이 물어봤었다.

당시는 전쟁에서 엄지가 잘리는게 아닌데도 물어봤다.

그렇게 물어본 결론은 어떤 사건을 통해 나는 할 수 없었다였고 그렇다면 대체 왜 그때 하나님 그렇게 응답한거죠? 하는 원망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하나님께 묻길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 길이 순탄함을 말하는게 결코 아니라는 걸, 절대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걸 맛보기 위해서 하게도 하신다는 걸 알았다.

순탄하지 않는 길을 맛보고 싶지 않다. 그런 길은 무섭다.

그리고 다시 우리들교회에 와서 일대일 양육을 또 받는데, 다시 물었던 긴 시간들이

결국 재혼해도 괜찮은 가정이고 싶었던 산당예배라는 걸 알았다.


엄청난 허무가 밀려왔다. 내 신앙생활은 뭐였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아무것도 모르겠다. 심지어 어떤 걸 묻고 안물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녀 문제로 방법적인 걸 잘 묻지도 않지만, 말씀을 봐도 방법적으로 뭔가를 하라고 말씀 하시지도 않는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가정 내 심리적 전쟁에서 하나님은 내게 방법도 안알려주고 나또한 어떤 방법을 생각하기 두렵고 에너지가 없어 무방비하고 무기력한 상태인 채로 자녀들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고난이 언제 끝날지 계수하기만 하면서 꾸역꾸역 그러고 있다. 피투성이여도 그냥 살아만 있는게 현재 내가 아는 유일한 거고 전부다.

마치 정복 당해야 했던 것은 내 가치관의 열심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이렇게까지 내가 부모로서 무력한 사람이었나 싶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 죽지 않고 살아있길 기도한다.


> 삶

1.시험보고 온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하겠습니다.

2.두렵다고 미루지 않고 숲에에게 내 생각을 차분히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야 하는 때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주님, 망나니같은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앞에서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주님 저는 가족 내 정신적 전쟁 속에서 주님께 물을 힘이 없습니다. 나의 물음은 날 위한 교묘한 기복이거나, 방법적인 해결의 추구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그것들을 피할 자신이 없습니다. 또한 지금은 모든게 지치고 힘들어 물을 힘도 알려주셔도 할 힘도 없습니다. 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 힘만 주어진 하루살이 같은 나약한 인간이 바로 저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부모가 되어 느끼는 깊고 깊은 절망 속에서 저를 건지시고, 자녀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우릴 위해 얼마든지 뜯어 먹혔던 예수님처럼 저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위해 여기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제가 잘 죽어지길 기도합니다. 제가 죽을 때 주님이 절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주님 제게 찾아와 주세요. 제가 잘 죽어 다시 살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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